[Verleugnung]의 글188 회식의 계보학 너도나도 불편한 것 투성이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 고치지 못하는 관습같은 것이 있다. 나에겐 회식이라는 것이 그랬다. 윗사람 입장에서는 가끔 귀찮기도 하지만 친목을 도모하자니 유지는 해야겠고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상관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나타나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왕관(코로나)을 쓰고 나타나 사람들에게 명한다. 너희 함께 모이지도, 식사도 하지 말지어다. 엄한 아버지가 나타난 뒤에야 서열이 정리되는 아이들처럼, 사람들의 갈등도 정리되기 시작한다. 회식 따위로 쓸데 없는 감정 소모를 벌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시작은 미미한 바이러스에 불과했으나 그 결과로서 창대한 개인성의 보장이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한낱 미물이 인간의 관습을 변화시키는 엉뚱한 계보.. 2021. 4. 9. 창조자의 오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본떠 만들었는데 그것들로부터 배울 것이 뭐 있겠냐는 말을 들었다. 어찌보면 오만한 생각은 아닌가. 창조자와 창조물 사이에는 포함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히브리 그리스 민족의 신들이 인간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전지전능함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창조자는 창조물이 가진 모든 속성을 보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비행기와 배를 만들어놓고 자신이 하늘을 날고 바다를 헤엄치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우쭐해한다. 그러나 창조자인 인간은 그저 그것이 자신들의 속성에 따라 공기와 물결을 타고 운동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해줄 뿐이다. 모든 사물에는 결이 있고, 그러한 사물의 결들이 모여 자연을 구성한다. 인간이 전능하게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자연이 기계 안의 자연을 촉발하고, 그것에 .. 2021. 4. 8. 소아성애 좀 무리해서 단순화시켜보자면, 푸코는 에서 말(말해지는 것)과 사물(보여지는 것) 사이의 '필연적인 것 처럼 보이는' 연결관계가 사실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는 A(가령 '사랑의 대상')라고 보이는 것을 A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지만, 사실 그것은 그 시대의 담론이, 그 시대의 미세한 권력의 그물망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의 소아에 대한 태도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소아성애에서의 '대상' 개념이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라는 것을 인정한다. 소아성애자들 본인은 소아가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애정과 성욕의 '대상'을 갖기 마련이며, 그 '대상'이라는 지위 안에서 모든 대상은 평등하게 애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21. 4. 2. 자해로 고통받는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람들은 아이들이 단순히 스마트폰에 중독됐다고 말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해로 고통받는 청소년들이 스마트폰과 맺는 관계에만 적용되는 어떤 독특성이랄 것이 있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성을 높인다. 그런데 이 불안은 범불안장애나 공황장애 환자들이 경험하는 불안과는 다르다. 그것은 공황이 올까 두려운 예기불안도 아니고, 오이디푸스적인 거세공포도 아니다. "혼자 있다는 느낌 때문에 불안해요"라고 아이들은 말한다. 낮 동안에는 친구나 선생님들과 모종의 상호작용을 하느라 바쁘게 지낼 수 밖에 없지만, 밤이 되면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연결들이 소멸되는 밤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시간이다. 귀신이나 강도 때문에 밤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이.. 2021. 4. 2.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4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