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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188

한국인들만 쓰는 표현 한국인들만 쓰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소리같은 것이 있다. 이전에 잠깐 알았던 필리핀 출신의 친구가 말했다. 너희들은 가끔 뭔가를 강조할 때 크르륵 하는 듯한 가래 끓는 소리를 낸다고. 으음? 불어도 아닌 한국어에 그런 발음이 있단 말이야?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크다'라는 단어를 강조하거나 '한참', '아주' 같은 단어를 쓸 때 '크으으다', '하아아안참', '아아아아주'처럼 초반에 목청 긁는 소리를 내고 있었더랬다. 나에게는 발음이라고 인식조차 되지 않았던 어떤 소리를, 발음과 발음의 사이에만 존재하던 그 무의미한 소리를 그 친구는 감별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2021. 3. 30.
능력의 다름은 어떻게 불평등이 아니라 통합을 야기하는가 사회적 정의와 분배, 통합의 관점에서 '능력의 차이'는 중요한 이슈다. 누군가는 어떤 능력을 더 혹은 덜 갖고 태어난다. 우리는 종종 서로 다른 능력치 때문에 위계와 불평등이, 그리고 결국은 계급의 갈등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능력이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것은 하나의 순위 체계로 등급매겨질 수 있는 속성인가?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006년 작 는 '능력'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쩌면 능력이라고 보기에 민망할 수도 있는 특정한 능력들을 보여준다. 한쪽으로만 아령 운동을 하는 바람에 오른쪽 팔만 비대해진 남자 레지, 신문의 낱말 퍼즐 풀기 고수 조이, 시끌벅적 주변을 산만하게 만드는 히피 무리,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 리즈, 어딜 가든 동물들을 끌어들이는 능.. 2021. 3. 28.
소통 가능성은 관계 가능성의 동의어가 아니다. 누군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2004년 작 을 보고 말했다. 이 영화는 소통의 부재 속에서 오히려 소통이 피어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고 말이다. 얼핏 패러독스처럼 멋있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냥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일 뿐이다. 이런 문장이 남발되는 까닭은 사람들이 '소통'과 '관계'의 차이를 너무 쉽게 소거해버리기 때문이다. 소통은 언제나 표준적인 공통요소를 필요로 한다. 둘 사이의 언어가 동일하면 할수록 소통의 강도는 더 높아진다. 그러나 관계는 이와 정반대다. 나의 언어를 더 버리고 포기할수록 만남과 관계의 가능성은 증가한다. 소통이 불가능해질수록 관계성이 강화되는 신비함은 바로 거기에 기인한다. 영화 이 수많은 Translation들의 결여와, 그 과정에서의 손실들(Lost)을 경유하고서도 사.. 2021. 3. 28.
백스테이지 20대 초반 빠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서빙 담당이었는데, 배가 고플 때면 주방에 들어가 남은 음식을 먹는 추태를 부리곤 했었다. 당시 주방에서 일하던 형은 나를 보면 "원래 백스테이지(주방 안쪽)에는 절대 들어오는 게 아니야"라며, 자신이 일하는 공간을 신성시하곤 했다. 실제로 백스테이지라는 곳에는 어떤 신성함과 신비함이 깃들어 있다. 맥도날드에서 실제로 햄버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나면 먹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장막 너머의 어딘가에서는 항상 어떤 일이 발생하며, 우리는 그 발생의 결과물만을 본다. 장막 너머는 환상의 공간이고, 완결된 공간이며, 오류가 없는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백스테이지를 직접 들여다보는 일은 상당히 실망스럽곤 했다. 살다보니 어디에나 백스테이지랄 것이 .. 2021.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