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erleugnung]의 글188

<포드 vs 페라리>가 진부한 주제를 표현하는 방법 는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인 대결구도를 암시하는 면이 있다. 포스터 속에서는 이제는 대배우라고 간주해도 좋을 맷 데이먼과 크리스천 베일의 두 얼굴이 서로 대립하면서 마찬가지로 모종의 대결이 암시되고 있다. 이런 종류의 헐리우드 식 전기 영화가 대개 그렇듯,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대결 혹은 대립의 구도는 어떤 성장기적인 교훈의 측면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인물들의 서로 다른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마치 헤겔 식의 지양이 일어나듯 새로운 제 3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속에서 충돌하는 가치들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고전적이다. 탄탄한 기본기와 실력, 원칙주의가 성공한다는 가치관과 쇼맨쉽, 마케팅, 계략이 성공한다는 가치관이 서로 대립하면서 투쟁한다. 영화는 상당히 솔직한 편인데, 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어찌보면.. 2021. 3. 20.
모방 청소년 병동과 성인 병동의 차이점을 열거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겠지만, 그 중 하나로 '모방'을 들 수 있겠다. 청소년들로 구성된 병동에서는 한 명의 청소년에게서 시작된 어떤 행위, 언표, 표현과 같은 것들이 삽시간에 모든 곳으로 퍼져나간다. 부모들의 주요 민원 중 하나가 "우리 애가 입원을 하고 나서 오히려 자해하는 걸 배워왔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모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기껏해야 이런 모방과 확산을 '전염'이라는 용어로 묶어냄으로써 방지해야 할 악덕의 하나로 규정하는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2021. 3. 19.
유비 우리는 '유비'를 조금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유비를 사용해 세계를 재현해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개의 얼굴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스마트폰의 소프트웨어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들의 두뇌를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유비를 하나의 이해의 틀로서 간주한다는 것을 넘어, 유비를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강조되고 있지 않다. 인간이 유비에 입각해 세계에 적응해 간다는 사실 자체는 그들이 유비에 입각해 세계를 이해하고 재현한다는 것을 분석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우리는 나무 껍질의 패턴에 자신의 몸 색깔을 맞추어가는 나방처럼, 언제나 우리 주변의 사물들의 결에 맡게 자신의 색깔을 바꾸고 모양을 바꾼다. 2021. 3. 19.
자화상 자화상 자화상을 그린다 하면 자신의 얼굴의 재현물을 그리기 마련이다. 나의 실재를 담기 위해 나의 거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나의 얼굴에 도달한 빛이 한 차례 거울에 가 닿고, 다시 거울에서 반사된 빛이 그림으로 옮겨지는 식의 이중의 반사 과정이 관여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의 실재함이 꼭 나의 거울상으로서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일까? 가령 나는 나의 시선이 바라보는 세계, 나의 시선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 그 자체를 캔버스 위해 그려냄으로써 나의 자화상을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일까. 2021.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