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leugnung]의 글188 인간의 사물화 사람들은 인간의 사물화를 경계한다. 우리가 타자를 사물화하면 할수록 타자가 비인간화돠고, 그를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문제의 본질이 타자의 사물화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문제는 사물의 지나친 비생물화에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물화해서 대면할 때 왜 꼭 그것이 상대의 비승인과 비인정으로 이어져야 한단 말인가?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우리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을, 식물을, 사물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21. 4. 20. 인공지능과 자해 문제 청소년들의 자해 충동은 특히 밤과 주말에 심해진다. 밤과 주말은 모든 관계성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친구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고, 의사와 복지사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해 부재하는 시간들. 그래서 주말에는 종종 큰 사고가 터지곤 한다. 아이들 개개인의 자해 문제 뿐 아니라 집단 자체의 소요도 증가한다. 감정 조절이 어려워진 아이들의 갈등이 정점에 이르기 때문이다. 회의 시간에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나누던 중 내가 원장님께 말했다. 이건 공상일 수도 있는데, 주말 동안에만 아이들에게 챗봇을 제공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나는 아이들의 관계에 대한 욕구를 우리 치료진들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물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장님은 자기도 챗봇의 다양한 성공사례를 알고 있.. 2021. 4. 20. 누가 나 좀 말려줘요 "Somebody stop me! (누가 나 좀 말려줘요!)" 영화 의 유명한 대사다. 가면을 쓰고 발광하는 미치광이나 할 법한 말 같지만, 의외로 우리도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참 요상한 데가 많아서, 자기가 일을 저지르면서도 누가 그걸 멈춰주었으면 하는 경향을 갖곤 한다. 정신병동 안에서 생각보다 자발적으로 강박을 요청하는 환자들이 많다는 사실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조절되지 않을 때, 그들은 외부의 강압을 이용해서라도 자신들을 멈추고자 한다. 라캉이 이야기했던 사례도 얼핏 비슷한 데가 있다. 아이는 엄마와의 이자적인 관계에서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엄마가 좋지만, 엄마라는 대타자와 대면하는 가운데 자신이 송두리째 삼켜져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버지.. 2021. 4. 20. 기억을 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장기하의 2집 앨범에는 라는 노래가 있다. 주인공은 우연히 구석진 곳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음반을 집어든다. 괜히 한 번 들어보고 싶더라니... 아뿔싸. 노래가 재생되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달랑 한 곡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여러모로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런데 프루스트와 장기하의 사례 둘 다에서 사물들의 역할이 강조되지 않는 점은 아쉽다. 사물은 단지 관문의 역할을 할 뿐, 기억의 주체는 전적으로 인간에 머문다. 이들의 사례에서 진정 기억을 담보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인간의 기억을 사물이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의 기억 체계 속에 인간이 끼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진정한 기억의 주체는 사물들 속에 .. 2021. 4. 10.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4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