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72 윤리학을 공부해보자 전에는 '윤리학'이라고 하면 그저 지루하고 시시한 학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왜 스피노자는 자신의 주저에 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더 멋있는 이름도 많을텐데 말이다. 가령 이랄지 뭐 좀 형이상학적으로 보이는 이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최근에는 '푸코의 윤리학'을 주제로 진행되는 수업을 청강 중인데, 처음엔 좀 의아했었다. 으음? 푸코가 웬 윤리학을? 푸코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나는 그런 문제점이 있는지도 파악은 못하고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실천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더라. 그래. 에피스테메고 권력이고 사방에 그런 것들 천지라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주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뭔데?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은 그러한 윤리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쉽게 말해, '도대체 어떻게 살 것.. 2021. 5. 24. 조현병의 관념론으로 조현병을 갖지 않은 사람이 조현병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 전통적인 도식에 따르면 흔히 '일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현실과 공상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갖고 있다. 그들은 꿈을 꾸지만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외부에서의 소리와 내부에서의 소리를 구별할 줄 안다. 반면 조현병 환자에게서는 이 구별이 모호하다. 환상이나 꿈은 현실 속의 경험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내부의 소리가 외부의 소리로 인식되면서 환청이라는 경험이 생겨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라캉이라면 이런 것을 보고 '그들이 언어와 상징의 체계에 진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조금 다른 시각을 취해보자면, 이들이 단지 관계의 차원에서 '일반인'과 다를 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 2021. 5. 20. 정동의 표현에서 관계 자체로 본격적으로 정신의학도가 되고 나서 나의 흥미를 끈 요소 중 하나는 정동(affect)의 방향성에 대한 것이었다. 정신의학자들은 정동이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가령 내가 어떤 타인에 대해 공격성(aggression)을 보이고 있을 때, 그것은 언제든 그 방향을 다른 대상에게로 (이것을 전치disposition라고 한다) 돌리거나, 혹은 나 자신에게로 방향을 전환 (이것을 자기에게로 전향 turning against self이라고 한다)시킬 수 있다 실제 임상을 보더라도 이런 일이 심상치 않게 벌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청소년이 부모님에 대해 무의식적 공격성을 보이는 경우, 이것은 종종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면서 자기 학대 혹은 자기 처벌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 2021. 5. 20.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프랑스에서의 68년 이후의 철학들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다양할 것이다. 내가 진료를 보는 데도 그것은 큰 영향을 미쳤다. 누구나 살다보면 세계의 사물들과 생명들을 바라보며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구분하기 마련이다. 고대에는 아름답고, 완전하며, 균형잡힌 것들만이 필연적인 것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 영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됐는데, 가령 생명과 의학의 관점에서는 혈당과 혈압이 조절되고, 병이 없으며,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필연적인 것의 지위가 부여되곤 했다. 그러나 우연적인 것이 우연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데에는 명석판명하고도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오히려 권력이 작용한다는 것, 그 권력에는 힘이라는 것이 깃들어 있다는 것, 힘과 권력과 배.. 2021. 5. 20. 이전 1 2 3 4 5 6 7 8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