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정신의학도가 되고 나서 나의 흥미를 끈 요소 중 하나는 정동(affect)의 방향성에 대한 것이었다. 정신의학자들은 정동이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가령 내가 어떤 타인에 대해 공격성(aggression)을 보이고 있을 때, 그것은 언제든 그 방향을 다른 대상에게로 (이것을 전치disposition라고 한다) 돌리거나, 혹은 나 자신에게로 방향을 전환 (이것을 자기에게로 전향 turning against self이라고 한다)시킬 수 있다
실제 임상을 보더라도 이런 일이 심상치 않게 벌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청소년이 부모님에 대해 무의식적 공격성을 보이는 경우, 이것은 종종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면서 자기 학대 혹은 자기 처벌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내막을 살펴보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공격성이 외부의 대상들에게 방향을 설정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요인들 (예 : 공격성을 받아줄 만큼 강하지 못했던 무력한 엄마, 너무 무서워서 감히 공격성을 표현할 수 없었던 아빠) 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정동이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가 사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정동의 발신자와 수신자를 먼저 설정하고 정동을 그것들 사이의 후속사태로 사유할 경우, 정동으로서 나타나는 관계의 영역은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각 인물들의 영역으로부터 뒤로 물러나 2차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반면 정동을 중심으로 수신자와 발신자를 설정하는 경우 우리는 정동이라는 것이 발생하고 있는 영역, 즉 어떤 영향(affect)력이 행사되는 영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관계의 영역 속에 들어서게 된다. 이런 관점 속에서 엄마에 대한 아이의 분노는 '(아이로부터) 힘이 발휘되고 있는 관계'로 해석되고, 아이에 대한 엄마의 분노는 '(아이에 대해) 힘이 행사되고 있는 관계'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자해의 문제를 해석하는 것은 훨씬 용이해진다. 자해를 자기 자신에게 돌려진 공격성으로 해석될 경우 우리는 언제나 타인에 대한 공격성에 대해 2차적인 것으로서의 자기 공격을 사유할 수 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 자기에 대해 갖는 태도의 영역을 '그 자체로' 사유하기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해를 자기관계로 해석하게 될 경우, 자해나 자기처벌이라는 사태를 그 자체로 자기관계성으로서 사유할 수 있는, 더 용이하고도 더 직관적인 해석의 방식이 가능하게 된다.
'[Verleugnung]의 글 > 철학적 단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리학을 공부해보자 (0) | 2021.05.24 |
---|---|
조현병의 관념론으로 (0) | 2021.05.20 |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0) | 2021.05.20 |
진료라는 현상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0) | 2021.05.20 |
오늘의 쓸데 없는 상념 (0) | 2021.05.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