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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윤리학을 공부해보자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5. 24.

전에는 '윤리학'이라고 하면 그저 지루하고 시시한 학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왜 스피노자는 자신의 주저에 <에티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더 멋있는 이름도 많을텐데 말이다. 가령 <실체론>이랄지 뭐 좀 형이상학적으로 보이는 이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최근에는 '푸코의 윤리학'을 주제로 진행되는 수업을 청강 중인데, 처음엔 좀 의아했었다. 으음? 푸코가 웬 윤리학을? 푸코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나는 그런 문제점이 있는지도 파악은 못하고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실천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더라. 그래. 에피스테메고 권력이고 사방에 그런 것들 천지라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주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뭔데? 라는 식으로 말이다.

 

<주체의 해석학>은 그러한 윤리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쉽게 말해, '도대체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푸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서 항상 누락되어 온 부분이 있다. "너 자신의 알라"라는 문장의 뒤에는 항상 "너 자신을 보살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푸코는 고대 그리스부터 전해져 온 윤리학적 가르침을 (데카르트적 근대 이후의 전통에서처럼) 단순한 인식적 앎의 차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수행의 측면이 결부되어 있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기돌봄(책에는 자기배려라고 해석이 돼 있다)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그리스에서 로마로 학문의 무대가 옮겨오면서 이 돌봄의 문제는 더 부각되기 시작한다. 자기돌봄은 자기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영역을 지칭한다. 언어로 치자면 재귀대명사적인 측면을 말한다. 내가 어떤 초월적인 평면을 매개해 나 자신과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가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과는 아주 상이한 메커니즘을 보인다. 나의 영혼을 돌본다는 것. 그러한 돌봄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자기를 관리하고, 도야하며, 훈련시키는 것. 그렇게 자신의 삶을 구성해가는 것.

 

내가 어쩌다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나는 기껏해야 존재론에만 흥미를 느껴왔던 사람인데 말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일단 존재론을 파다보면 결국 그 존재론을 갖고 어떻게 살 거냐는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아무래도 직업적인 부분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싶다. 청소년 환자들을 주로 보게 되다보니 이 아이들을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관심이 가게 된다. 내가 할 역할은 무엇일까? 이 아이들의 삶을 이끄는 것? 지도하는 것? 내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 아이들이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잘 구성할 수 있도록 매개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 아닐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나 자신부터 '돌봄'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터. 윤리학 쪽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 그리고 언제 시간이 되면 위센터에 청소년 환자들을 위한 '윤리학' 수업을 도입해보는 것은 어떨까. '도덕' 수업 말고 진짜 '윤리학' 수업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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