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을 갖지 않은 사람이 조현병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 전통적인 도식에 따르면 흔히 '일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현실과 공상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갖고 있다. 그들은 꿈을 꾸지만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외부에서의 소리와 내부에서의 소리를 구별할 줄 안다.
반면 조현병 환자에게서는 이 구별이 모호하다. 환상이나 꿈은 현실 속의 경험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내부의 소리가 외부의 소리로 인식되면서 환청이라는 경험이 생겨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라캉이라면 이런 것을 보고 '그들이 언어와 상징의 체계에 진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조금 다른 시각을 취해보자면, 이들이 단지 관계의 차원에서 '일반인'과 다를 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관계라 함은 현실 속의 물리적인 것과의 관계 뿐 아니라 관념 속의 어떤 것들과의 관계도 모두 포함한다고 가정하자. 이 관계라는 것을 거칠게 보았을 때 크게 세 가지의 차원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외부의 무엇에 '대하여' 작용하는 관계의 영역이다. 둘째는 외부의 무엇'으로부터' 작용받는 관계의 영역이다. 셋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작용을 맺는 그런 영역이다.
조현병 환자들이 경험하는 세계의 상당한 부분은 셋째 영역으로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경우, 이들은 '겉보기에' 다른 이들과 함께 공간을 사용하며 소통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폐적으로 자기의 내부에서 스스로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산출되는 무엇을 그 자체로서 현실로 대면하는 경험을 한다. 자기관계의 극단적인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자기관계라는 것의 독특함은 그것의 상당부분이 관념적인 차원에 속한다는 면에 있다. 현실과 물리적인 것을 매개로 하는 경험의 영역을 들여오면 올수록 그들의 경험과 관계의 영역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적어진다.
철학의 역사는 관념론의 극복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물리적) 경험을 배제한 순수한 관념의 체계야말로 오히려 조현병 환자들의 경험을 잘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는 상당한 아이러니가 있다. 우리는 '일반인'의 철학을 하느라 경험을 중시해왔고, 그만큼 현실과 물리적인 사태의 영역을 중시하느라 관념적인 세계에서 소외된 영역들을 점점 더 소외시켜왔는지도 모른다.
조현병 환자들의 정신 세계 속 인물과 사물들은 현실 세계 속의 그것들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면에서 그들의 관념 속으로 더더욱 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일반인의 관념론'에서 '정신증의 관념론'으로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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