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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72

강박증자가 보는 세계 # 조만간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 공개된다고 한다. 처음 접했던 그의 영화가 아마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당히 신선해서 이후 몇 개를 더 찾아보다가 을 알게 됐고, 그 때쯤부터 이 사람의 작품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 그의 영화를 볼 때 묘하게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감정이 최대한 억눌려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점은 그가 죽음이라는 요소를 다룰 때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에서 자신의 아들(인 줄 알았던) 젊은이가, 의 축을 담당했던 테넌바움씨가, 에서 주인공의 죽음이 다루어지던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것을 전형적인 한국식 신파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해보길 바란다. # 심지어 죽음이라는 요소가 잔혹함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조차 그는 인위적일만큼.. 2021. 10. 26.
친근함이라는 가상 타파하기 사실 알고보면 추상적이고 사후적인 개념이지만 마치 원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개념들이 있다. 가령 '우울증'이라든지 (우울증이라는 것은 다양한 맥락들에서 나타나는 불편감들이 사후적으로 추상되었을 때 나오는 단어다) '화남', '친근함' 등이 그렇다. 이와 관련해 오늘 점심 식사를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어서 끄적여본다. 새 직장(종합병원으로 옮겼다)에 온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점심 시간이 그렇게 뻘줌할 수 없다. 물론 다른 의사 선생님들도 와서 조용히 식사만 하고 가시기는 한다. 근데 괜히 나만 신참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서로 간에 면식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오늘도 뻘줌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직 친근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구나. 언제.. 2021. 10. 21.
내러티브를 읽는 능력 경험이 많이 쌓인다는 것은 그 바닥의 내러티브를 잘 읽게 된다는 것과 같다. 건축일을 오래 하는 사람은 집의 대강만 살펴보고도, 영화를 많이 찍어본 사람은 남이 만든 영화를 대충 훑어보고도 작품에 내재된 대강의 구조를 금새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정신과 의사의 일에도 비슷한 데가 있다. 얼마 전부터 분석가 과정에 입문하기 위한 심층 수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수련 동기 중 한 명이 환자 케이스를 발표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전공의 시절 곧잘 그랬던 것처럼 환자의 동의를 받아 면담 내용을 녹취한 후 그 내용에 기반해 스크립트를 작성해왔다. 근데 우리는 그 일로 수퍼바이저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수퍼바이저 말씀에 따르면 녹음이라는 행위는 치료자와 내담자의 내밀한 관계에 제3자가 끼어드는 느낌을 주.. 2021. 10. 6.
운동선수와 언어 이전에 청소년 관련 학회에 참석했다가 스포츠 정신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한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상당히 신선했는데, 그것이 소통에 대한 참신한 관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소위 운동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상담을 이끌어가는 것이 녹록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유로 거론되는 것들은 대부분 그런 친구들의 능력 결여에 초점을 둔다. 가령 집중력이 약하다든지,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못해봤다든지 등등... 그런데 이 교수님은 그런 것을 결여로 해석하기보다는 차이의 일종으로 해석하는 것 같았다. 그게 뭐 그리 새로운 내용이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신기한 것은 그런 차이에 입각한 전략들이 실제적으로 성공하는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친구들은 말보다 몸을 통해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말에 담기.. 2021.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