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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내러티브를 읽는 능력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10. 6.

경험이 많이 쌓인다는 것은 그 바닥의 내러티브를 잘 읽게 된다는 것과 같다. 건축일을 오래 하는 사람은 집의 대강만 살펴보고도, 영화를 많이 찍어본 사람은 남이 만든 영화를 대충 훑어보고도 작품에 내재된 대강의 구조를 금새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정신과 의사의 일에도 비슷한 데가 있다. 얼마 전부터 분석가 과정에 입문하기 위한 심층 수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수련 동기 중 한 명이 환자 케이스를 발표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전공의 시절 곧잘 그랬던 것처럼 환자의 동의를 받아 면담 내용을 녹취한 후 그 내용에 기반해 스크립트를 작성해왔다. 

근데 우리는 그 일로 수퍼바이저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수퍼바이저 말씀에 따르면 녹음이라는 행위는 치료자와 내담자의 내밀한 관계에 제3자가 끼어드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신뢰에 큰 문제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녹음을 하지 않고서 45분 동안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어찌 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가?

사실 정답은 "그렇다"이다. 내공이 많이 쌓인 치료자들은 대부분 녹음이나 필기를 전혀 하지 않아도 그 날 있었던 면담 내용을 거의 다 복원해낼 수 있다. 가끔은 초심자들이 자기 환자 케이스를 지도감독 받으러 갔을 때, 수퍼바이저가 그 담당 치료자보다 환자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많다. 처음 1년차가 됐을 때는 응급실 당직 서는 게 그렇게 힘들 수 없었다. 특히 차트 작성이 고역이었는데, 거기에 이 사람의 과거력, 성격, 대인관계, 학력, 가족력, 등등에 대한 정보가 빠짐없이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졸려 죽겠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정보들을 기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시간 순서대로 논리있게 설명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그래서 그것들을 시간 순으로 재조직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의미있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것을 선별해 중요한 순서로 이야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듣는 의사 입장에서도 그게 구별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는 더 많이 걸린다. 

그런데 훈련이 반복되다보면 내러티브의 결을 읽는 능력이 생기고, 그것들을 무의식적으로 범주화하고 조직화하는 능력이 쌓인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책을 대충 훑어보고도 그 책의 내용을 금새 파악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실제로 요즘 나는 베드사이드에서 면담을 할 때 필기구를 전혀 챙겨가지 않고도 그 날의 면담 내용을 다 기억하는데, 그 복원된 내용이 오히려 초심자 때 일일이 베껴적던 시기보다 더 정확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정신치료 시 내담자의 내러티브를 이정도로 기억할 수 있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경험의 세계, 내공의 세계는 정말 넓고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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