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사람들을 진료하지만 내가 그 사람들을 다 '살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배운 지식에 기반해서 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고, 상품 생산자가 상품을 받아보듯 특정한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끔은 '내가 이 사람을 정말로 도와줬구나!'라고 느껴지는, 그래서 스스로 칭찬을 해주고 싶은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들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좀 알려주는 게, 상식을 쌓는 의미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어떤 젊은 여성이 십년 넘게 우울증을 앓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며 나를 찾아왔다. 당시 다행히도 환자들이 별로 없었고, 그녀의 말을 깊게 들어줄만한 여력이 됐었다.
그녀는 자신이 전혀 우울할 이유가 없는데도 우울한 것 같다면서, 약을 먹는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약을 안 먹는다고 나빠지는 것도 아니라서 자기가 진짜 우울한 것인지조차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겨져 우울한 감정이 생기는 패턴을 물었다. 어떤 주기 같은 게 있는 듯 했다. 혹시나 싶어 생리 주기를 물었다. 그녀는 생리주기와 겹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주기를 체크해보자고 말했고, 그렇게 두 달 정도 추척을 했다. 결론은 월경전불쾌감장애 (Premenstrual dysphoric disorder) 였다. 그녀는 기록을 하고 나서야 자신의 감정이 주기에 의해 변한다는 것을, 인간의 감정이 그깟 생리 때문에 이정도로 우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는 놀라워했다.
나는 그런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리 하나만으로 자살시도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 이후로는 이 여성이 자신의 생리주기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서, 결국 병원에 오는 주기도 뜸해졌다.
#
비슷한 사례로 온 두 사람의 성인이 있다. 이들은 상당한 우울감을 호소하며 나를 찾았다. 겉보기에도 우울해보였고, 이전 병원에서도 계속 우울증에 준해 치료를 받아온 이들이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우울감을 느끼는 주된 원인이 직장이나 학교에 있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직장에서 상사의 꾸짖음이 잦아 그것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는 몇 차례의 만남에 걸쳐 그 꾸짖음의 근원이 무엇인지 물었고, 대부분 꾸짖음은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거나, 실수하거나, 누락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사람은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일이 거의 없었다는 식으로 불편감을 초래했다.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함께 했다. 처음에는 우울증에 의한 기억력 저하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의 생활패턴에 대한 과거력을 수집하다보니 주의집중력에 상당한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에 도달하게 됐다.
두 사람 모두에게 간단한 ADHD 선별검사를 진행했는데, 상당히 높은 점수가 도출 됐다. 나는 어쩌면 모든 것의 원인이 ADHD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실제로 ADHD로 인한 이차적인 우울증은 그 심각도가 무시하지 못할 만한 수준이다) 이들에게 약물을 처방했다.
이들은 놀랍도록 극적인 호전을 보였다. 일이 잘 되고, 상사에게 욕을 먹는 횟수가 줄었다는 것이다.
#
내가 능력이 훌륭해 이런 경험을 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다만 아직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풋내기 전문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열정이 몇 년이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 피드백은 별로 없지만, 스스로라도 피드백을 주면서 가능한 한 잃지 않아보려 한다.
'[Verleugnung]의 글 > 철학적 단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동선수와 언어 (0) | 2021.07.22 |
---|---|
통역사로서의 정신과 의사 (0) | 2021.07.22 |
자유와 물리적 제약 (0) | 2021.07.22 |
오늘의 발견 : 내용의 결여가 반복되기도 한다. 게다가 감정의 신체적 표현을 통해서 말이다. (0) | 2021.07.22 |
아기를 기다린다는 것 (0) | 2021.07.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