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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오늘의 발견 : 내용의 결여가 반복되기도 한다. 게다가 감정의 신체적 표현을 통해서 말이다.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7. 22.

감정에도 문법이랄지 내러티브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인데, 말하자면 사람마다 감정이 조직화되고 구성되는 방식이 다르다. 영화의 문법을 보는 것 같다고 느낄 때도 있다. 이러저러한 스토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정 쇼트의 특정 미장센 아래 특정 감정이 터져나온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문법이 너무나 교과서적이어서 놀라울 때도 있다.

 

정신분석 교과서라는 것은 그러한 문법들의 표본을 모아둔 백과사전과도 같다. 우리는 책에서 전형적인 문법을 배우고, 인간의 정신이 그러한 문법에 따라 표현되는 것을 관찰한다. 문법은 반복되고 패턴화되는데, 분석가라 함은 그런 패턴을 언어적 형태로 재조직화해 내담자에게 되돌려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반복이 가진 치료적 의미가 있다. 무언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 특정 문법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내담자에게 깨닫게 하는 것. 치료는 그런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의 위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때로 그것은 문법의 테두리를 뚫고 나와 자신의 힘을 표현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것의 결여나 부재가 반복되는 일마저 있다. 오늘 내가 경험한 사건도 정확히 그런 맥락에 있었지 않았나 싶다.

오늘은 한 모자와 면담 시간을 갖게 됐다. 정확히는 소년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힘들다'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우울감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질문에 대해 그는 '모른다'고 답했는데, 아마 그것이 그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가능한 한 퍼즐을 맞춰보며 그의 내면 세계를 이해해보려 했다.

 

자신의 가족 관계를 이야기할 때였나, 그의 눈에 잠시 눈물이 고였다. 나는 잠시 당황했는데, 그 눈물이 다소 뜬금 없는 지점에서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는 그게 눈물인지 아닌지도 애매해 한동안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던 것도 같다. 그가 눈가로 휴지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내가 본 것이 맞다고 안심했다.

 

내담자와 면담을 하다보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의 가족들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보기 마련인데, 아마도 어머니는 다소 냉담하든가 무관심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 스스로에게서 어떤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소년의 정신역동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이의 내적 세계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내러티브가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원인이 있다면 엄마 쪽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나는 어머니를 꼭 만나 필요하다면 보호자 교육을 시행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이미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맞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 비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나름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원인이 전적으로 '나쁜 엄마'에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어머니 본인 안에 있는 우울의 내러티브가 자녀 안에서 반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머니 본인의 감정을 탐색해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이 어떤지 물었다.

 

그러던 중 독특한 장면을 보게 됐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뜬금없는 지점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방금 전과 거의 유사한 당혹감을 느꼈다. 문법에 맞지 않는 구문이 튀어나온다는 느낌. 무언가 앞 뒤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

 

이런 경우 대부분 내담자 본인 스스로 앞 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정동에 대한, 그것이 위치한 맥락과 내러티브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그것이 치료자에게 투사되고, 치료자는 동일한 혼란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 소년으로부터 전해들었던 '모른다'는 그 느낌, 그 혼란스러운 느낌이 이런 문법 속에서 표현된 것은 아닐까. 반복은 내러티브의 반복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의 결여의 반복으로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여의 반복은 어머니에게서 자녀로 그렇게 대물림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이 사건이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이유를 간략히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이 사건이 내용의 반복이 아닌 내용의 결여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면 '있는 것'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없는 것'이 반복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다. 없는 것은 그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을 감정을 통해 설명해보면 이렇다. 어머니가 A라는 감정을, 가령 '분노'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고유한 패턴을 갖고 있을 때 이것은 아들에게서도 유사하게 표현될 수 있다. 분노 조절을 못 하는 어머니의 아들은 역시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는 등으로 말이다. 여기까지는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모자의 경우 그렇게 반복될 만한 '내용'이랄 것이 없었다. 울음으로서 표현되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우울'도, '분노'도, '회한'도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었다면 치료자인 내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울음은 분명 어딘가 탈맥락화되어 있었다. 감정이긴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감정과는 달랐던 것이다.

 

둘째는 내용의 결여의 반복이 '울음'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결여가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될 경우 그것이 반복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가령 어머니나 아들 모두 '저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어요'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각보다 흔하지는 않다. 사람들은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아는 상태에서 병원을 찾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감정을 '가진' 사람조차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이 많은데, 하물며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훌륭한 치료자는 표면보다 표면의 배후를 봐야 하고, 전경보다는 배경을 봐야 한다는 말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서를 통해 그 배경에 어떠한 내용이 있는지 알아차리는 능력, 나아가 그러한 내용이 결여돼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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