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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타인의 자살 충동에 윤리적으로 대처하기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6. 21.

 

"나는 나를 포기했다니까요? 왜 퇴원하지 못하게 놔두는 거에요!"

 

아이가 울며 소리친다. 자살충동을 경험하는 환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청소년들을 대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특히 아이들이 '내가 나를 포기했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말을 할 때는 종종 말이 막힌다.

 

말이 막히는 것은 사실 내 개인 신념에서 연원하는 부분이 많다. '왜 사느냐?'는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된 답을 내려본 적이 없다. 종교를 가진 것도 아니고 무신론자이기에 더 그런 면도 있었다.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뿐이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니, 최대한 즐기면서 살면 그만이다. 아니면 바쁘게 사는 것도 괜찮다. 일을 하고, 뭔가에 몰입을 하고, 사회 속에서 기능이랄 것을 수행하며 살면, 그리고 그렇게 사는 과정 중에 '삶의 이유' 따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만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그런 답을 들려주기는 어렵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아이에게 어떻게 재미를 찾아보라는 이야기를 하겠는가. 이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학교에 다니지 못해서 문제인 아이에게 어떻게 일에 몰입해보라고 말하겠는가.

최소한 정신과 의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안다. 네가 죽으면 다른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겠냐는 식의 타인 중심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 너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식의 꼰대식 설교를 늘어놓는 것. 그런데 이런 것들을 피하다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전긍긍할 때가 많다. 물론 교과서적인 답은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다. 얼마나 힘들지 환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통할 때만 통하지, 지금처럼 환자의 퇴원을 강력히 막아야 할 때는 부적절한 경우가 많다.

 

퇴원을 막되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전공의 시절에 한 성인 여자 환자가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낫게 하고 살게 만들겠다'는 식으로 말했다가 윗년차 선생님들에게 호되게 혼난 적이 있다. 그 환자가 경계성 성격장애로 의심되는 상황이어서 더 그랬던 면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구원자가 되고 싶은 나의 인간적 욕구가 과하게 환자 앞에서 표출됐다고 지적하면서, 장기적으로 환자와의 관계에서 적절치 못하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렇게 중립성을 최대한 지키며 이야기하다보니 소극적인 대답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물우물하다가 '우리나라 법규 상 자살하는 사람은 구제하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법을 운운하거나, '너라면 길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죽게 놔두겠느냐'는 식으로 관점을 바꿔보게 하는 식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보자면 이런 대답들은 생각보다 중립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공감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저는 그냥 그런 사람 죽게 내버려둘 건데요?'라는 식의 반발을 낳았던 것 같다.

 

얼마 전 내가 윤리학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잠시 윤리학적 관점을 적용해보게 된다. 청소년 환자를 대하는 일에는 언제나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아이들에 대해 정신과 의사가 하는 일은 치료자의 역할이자 보호자의 역할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선생님 특히 윤리 선생님과 같은 역할이기도 하다. 내가 아이에게 어떤 식의 말을 건네느냐에 따라 아이의 가치관 형성이 좌우될 수도 있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건네주어야 할까.

 

잠시 칸트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칸트의 도덕 혹은 윤리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명령적이다. 칸트는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도덕률을 비판한다. 도덕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자살하지 않는 삶이 옳은 삶이다'라든지, '네가 죽으면 부모님은 어떻게 살겠니', 혹은 '사람들이 다들 자살을 하면 사회가 불안정해진다'는 식의 도덕은 내용에 의거해 진행되는 도덕이다. 거기에는 어떤 최고의 덕목에 대한 요구랄지 감성적인 것들의 영향력이 끼어든다. 사회 전체적인 손해와 이득에 대한 관점이 들어가게 되면서 공리주의적인 관점이 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인간은 도덕과 관련해 일종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칸트는 인간을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두는 도덕이 올바른 도덕이라고 말한다. 또한 나는 내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준칙을 나의 명령으로서 스스로 입법시키고,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만 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자살에 대해 나는 어떠한 준칙을 받아들이고, 또 그러한 준칙의 존재를 아이에게 드러내줌으로써 아이가 그것을 적절히 용납할 수 있게 만들고, 또 한편으로 아이가 그런 것을 내재화함으로써 적절한 모델링을 할 수 있게 만들까?

 

라깡이 욕망의 윤리학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한 안티고네의 이야기에도 상당히 칸트적인 데가 많다. 안티고네의 오빠는 반역자 취급을 받고 사망 후 당국으로부터 '야생동물에게 그 시체가 먹히게 하라'는 명을 받는다. 누구도 그의 장례를 치뤄줘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체를 몰래 묻어준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도 다분히 형식주의적인 윤리가 끼어들어 있다. 안티고네는 오빠를 감정적으로 사랑했기 때문도 아니고, 다른 가족들을 고려해서도 아니라, 그저 '그가 오빠이기 때문에' 그를 묻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타인의 자살을 막는 것과 관련해서도, 그저 '그가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를 살려야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아이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지금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 아이에게는 공감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윤리학적인 모범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면 상 길어질 것 같아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지만, (그 자신이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느라 아이에게 적절한 경계선과 룰을 제공하지 못했던) 아이의 어머니를 대신해 아 이에게 확고한 경계선을 제공해줄 필요가 있었다. (라깡도 그렇지만 상당히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아이들이 사실은 부모로부터 '확고하고 일관적이며 힘있는 법과 규제'의 측면을 욕망한다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물론 규제는 적당한 수준에서만 제공되어야겠지만.)

아이에게 '네가 너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해도 괜찮다. 그만큼 네가 힘들다는 뜻이니까."라고 말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묻는다. "그럼 지금 당장 병동에 올라가서 자살 시도라도 하라는 말인가요?"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지만 선생님은 네가 자살 시도를 하면 바로 가서 너를 살릴 것이다. 네가 또 자살 시도를 하면 또 살릴 것이고, 네가 열 번을 해도, 백만 번을 해도 선생님은 매번 가서 너를 살릴 것이다"고 말을 해주었다.

 

나는 내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개인적 의미를 제공하지도, 아이가 사는 것이 가족과 사회에 이득이라는 식의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이가 그 지점에서 울음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다면 일단 계속 입원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일까.

 

아이가 병실에 올라가고 나서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요청했다. 요 며칠은 아이의 자살 시도와 관련해 각별히 주의를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행히 아직까지, 아이는 문제 없이 병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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