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에도 종류가 있다. 군대 간 아들을 둔 어머니의 기다림, 롱디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의 기다림,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 백마 탄 초인에 대한 기다림 등등. 그런데 이 기다림들에도 공통점이랄 것은 있다. 모두 현재 부재하는 대상, 이 곳에 없는 대상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 기다림이라는 감정은 그 부재의 대상이 곧 임박한 상태에서 더 극적으로 풍성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공항이라는 공간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리워하던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직후부터, 입국 출입문을 통해 카트를 끌고 들어오는 그 순간 까지의 그 사이 말이다.
자동문이 열리면서 그리워하던 가족의 얼굴을 보게될 때의 그 환희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만남의 장소로서 공항이라는 장소가 갖는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각설하고,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얼마 전 이와 비슷한 감정의 색깔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한 건 그것이 공항이 아닌 전혀 다른 장소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아내의 불룩 튀어나온 배다.
이제 조만간 아이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무언가 설레면서 기다려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문득 어릴 적 공항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나는 왜 아내의 배를 쳐다보면서 뜬금없이 공항을 떠올렸던 것일까.
아마도 그 기다림의 양상이 유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공항이라는 공간의 묘미는 비행기의 착륙후 입국 출입문이 열릴때까지의 그 시간 간격 속에 있다. 그 시간 동안 그리움의 대상은 바로 코 앞에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모습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은 애매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한국이라는 공간에 속해 있지만, 아직 완전히 같은 공간으로 포섭되지는 않은 그런 지점에 속하고, 그것이 어떤 오묘한 기다림의 정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현재 우리 아이가 속한 공간적인 위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만, 아이는 바로 지금도 내 옆 우리 아내의 불룩한 배 안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다. 거리 상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장소에서 말이다.
바로 옆에 있지만, 아직은 완전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애매한 지점 사이에서 우리 부부는, 공항에서의 어린시절의 나처럼, 어떤 독특한 기다림의 정서를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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