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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강박증자가 보는 세계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10. 26.

# 조만간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 공개된다고 한다. 처음 접했던 그의 영화가 아마도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당히 신선해서 이후 몇 개를 더 찾아보다가 <로얄 테넌바움>을 알게 됐고, 그 때쯤부터 이 사람의 작품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 그의 영화를 볼 때 묘하게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감정이 최대한 억눌려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점은 그가 죽음이라는 요소를 다룰 때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스티브 지소>에서 자신의 아들(인 줄 알았던) 젊은이가, <로열 테넌바움>의 축을 담당했던 테넌바움씨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주인공의 죽음이 다루어지던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것을 전형적인 한국식 신파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해보길 바란다.

 

# 심지어 죽음이라는 요소가 잔혹함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조차 그는 인위적일만큼 그것들을 무미건조하게 다룬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 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만큼 잔혹한 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 손이 잘리거나, 목이 잘려나가거나, 피가 철철 넘쳐 흐르거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은 장면들이 넘쳐나는데도 전혀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더군다나 인물들이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어색(나는 사실 이 어색함이 그의 영화를 맛깔스럽게 만든다고 본다)하기 그지 없다. 어색하다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대본에 쓰여진 지문을 그대로 '연기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약간 버스터 키튼의 구식 슬랩스틱 같은 느낌이 묻어 있다고 해야 하나.

 

# 가령 놀라움을 표현해야 하는 맥락에서 인물은 갑자기 '놀라움을 표현하는 눈썹 모양'을 한 채로, 갑자기 당혹스러운 채 도망가는 듯한 다소 우스꽝스러운 시늉을 한다. 행동과 행동 사이의 연결이 매끄럽기보다는 오히려 튀고, '나는 지금 이 감정을 이런 행동으로 표현한다'는 식의 상징성이 많이 드러난다.

 

# 그게 그렇다고 또 싼티가 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게 전적으로 출연진들의 내공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면 대부분 무표정 연기를 기막히게 하는 사람들인데, 빌 머레이라든지 에드워드 노튼, 아니면 랄프 파인즈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메소드 연기'라든지 아니면 막 감정에 복받쳐서 연기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지 않나.

 

# 정리하자면 감정이라는 차원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가면서 억압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직업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게 괜히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웨스 앤더슨의 작품세계'라는 전체 그림과 잘 어울리고, 나름의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 그 '작품세계'랄 것이 가장 유명하게 된 데에는 아마도 그의 미장센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 유명한 대칭 강박 말이다. 스탠리 큐브릭 뺨치는 이 사람의 대칭 강박을 보고 있자면 (그 일관성의 측면에서) 대단하다고 혀가 차질 정도다. 심지어 종종 인터넷에 올라오곤 하는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 사람은 옷을 입을 때도 참 대칭을 잘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 강박증자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억압에 그 토대를 둔다. 그게 성욕이든 성욕이 아닌 보편적 리비도이든, 그런 것들은 자유롭게 펼쳐지기보다는 억압되어야만 하고, 통제되어야 하고, 그래서 언제나 우회된 방식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흘러나가게'해야 한다. 그 우회된 방식이 신체 증상이나 경련 혹은 마비로 나타나는 것이 히스테리라면, 정리과 정돈, 대칭, 청결, 완고함과 완벽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강박증이다. 말하자면 웨스 앤더슨은 그 흘러나감을 기막히게 예술로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글 쓰다가 혹시나 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역시나 그를 강박장애라고 진단하는 글들이 꽤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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