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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72

세계는 하나의 번역이다 우리는 번역(transl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항상 어떤 고정적인 판본들이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어떤 철학서에는 원전이 있고, 그에 대한 번역물이 있다. 번역에 대한 관점이 문헌학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의 연료는 엔진 속 크랭크와 실린더를 거쳐 바퀴의 운동으로 번역된다. DNA는 RNA를 거쳐 단백질로 번역(translation)된다. 정신과 의사는 언제나 환자의 말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개입(intervention) 방식을 마련한다. 이런 관점들에서는 언제나 번역이라는 과정 이전에 '번역이 되는 어떤 것'이 상정되곤 한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번역이라는 과정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닐까?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중 번역을 거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하물며 .. 2020. 11. 10.
습관과 관습 나의 아내는 예전에 성악을 전공했던 사람을 상사로 모시고 일한 적이 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 상사는 점심 식사 후 함께 커피를 마시러 가면 항상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 봉을 타서 마셨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오래하다가 몸에 밴 습관 같은 거였다고. 그 나라 사람들은 다들 커피를 그렇게 마신다나 뭐라나... (내가 직접 본 건 아니라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 말을 듣고 혼자 공상을 하다가 습관과 관습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성악가가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타서 마시는 건 습관에 의한 걸까 관습에 의한 걸까? 관습을 내면화하다보니 습관이 된 걸까? 생각해보면 습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흄도, 들뢰즈도 습관을 이야기했다. 원효는 이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사.. 2020. 11. 10.
'몽글몽글'이란 무엇인가 주말 동안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여유를 즐기던 아내가 말했다. "이런 게 진정한 행복이지. 남편과 함께 이런 몽글몽글한 느낌을 함께 가지는 것." 큰 시험을 앞두고 있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는, 백번 양보해서 앞의 문장은 무슨 말인지 이해라도 할 수 있지만, 뒤쪽 문장은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몽글몽글하다는 말 처음 들어봐?" 아내는 함께 있을 때의 그 좋은 느낌을 모르냐고 물었고, 나는 함께 있으면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몽글몽글함'이라는 수식어와 동일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내가 그 감정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해줬는데, 내가 이해를 잘 하지 못하고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아내의 답답함은 이내 충격으로 변하는 듯 했다. "난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우리 둘 다.. 2020. 11. 10.
AI는 전기양의 꿈을 투사하는가 에이아이는 전기양의 꿈을 투사하는가. 최근 친구가 소개해준 흥미로운 기사. AI에게 계속해서 잔인한 게시물들만을 보게 학습을 시킨 뒤, 로샤검사를 시켰더니 온통 잔혹한 해석들만 내놨다고. AI에게도 정신이라는 게 있을까. 일전에 'AI에게도 정신병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말을 했다가 누군가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뭐 나름의 일리도 있는 말이었다. 다만 그 때 느꼈던 건, 사람들이 아직도 인간의 관점을 들이밀어 정신을 규정하려는 습관 속에 갇혀 있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정신은 영혼과 동일한 것도, 어떤 뇌의 회로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정신은 일종의 어떤 기능이다. 우리는 그런 기능을 대면하며 대인관계를 맺고, 타인을 관찰하고, 나를 표현한다. 정신과 의사들이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기 위해 뇌를 뜯.. 2020.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