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72 구조는 내용을 결정한다 글을 쓸 때나, 영상을 제작할 때 어떤 프레임이 정해지고 나면 상당히 용이하게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경험한 적 있는가? 구조는,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부분 내용을 결정한다. 정신과적 치료에도 비슷한 구조의 문제를 건드리는 분야가 있다. 불면 치료 지침에 따르면, 환자들은 '잠이 올 때를 제외하고는' 침대에 눕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침대라는 구조를 잠에 대해 조건화(Conditoning)시키되, 잠 이외의 용도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는 소거(Extinction)를 진행시켜나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성공적으로 반복하면 환자는 침대가 있는 공간에 가기만 해도 잠이 오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령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공부는 커녕 TV를 켠다고 해서 당신의 의지를 치료해야 하는 것만은 .. 2021. 3. 22. 행동은 가치를 모른다 행동은 가치를 모른다 사변적인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행동주의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랬다. 그들의 사유가 종종 빈약하고 공허하며 피상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전문의 시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행동주의 공부를 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그들의 사유가 시사하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행동은 가치를 모른다 - 이것은 내가 새로 배우게 된 몇 가지 깨달음 중 하나다. 나는 행동주의를 통해서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던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행동'을 '정신적 가치'와 분리시키지 못한다. 가령 내가 당신을 때리는 것은 당신을 미워해서이고, 내가 어떤 것을 먹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유.. 2021. 3. 21. '음악을 듣는다'는 경험은 수동적인 감각경험인가? 최근 노래를 틀어놓고 운전을 하고 가다가 터널에 진입하면서 이상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터널 안 자동차들이 내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 내가 듣던 노래소리가 파묻혀버렸고, 희미하게 들렸다 말았다 하는 다소 답답한 상황이 연출됐다. 어딘가 귀찮아 음량을 키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노래는 듣고는 싶어 귀를 기울여 듣게 됐는데, 노래의 아주 미미한 부분 부분들만이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서 완전한 노래가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평소 큰 소리를 음악을 듣고 있을 때도, 사실은 수동적으로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머리 속에서 어떤 능동적인 재생을 진행시키고 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나의 머리가 노래를 재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2021. 3. 20. 모방 청소년 병동과 성인 병동의 차이점을 열거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겠지만, 그 중 하나로 '모방'을 들 수 있겠다. 청소년들로 구성된 병동에서는 한 명의 청소년에게서 시작된 어떤 행위, 언표, 표현과 같은 것들이 삽시간에 모든 곳으로 퍼져나간다. 부모들의 주요 민원 중 하나가 "우리 애가 입원을 하고 나서 오히려 자해하는 걸 배워왔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모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기껏해야 이런 모방과 확산을 '전염'이라는 용어로 묶어냄으로써 방지해야 할 악덕의 하나로 규정하는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2021. 3. 19.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