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72 좋아함과 원함 #1. 현대 정신의학에서 핫한 개념들 중 하나가 '좋아함(Liking)'과 '원함(Wanting)'이라는 개념이다. 다분히 철학적인 냄새가 풍기는 개념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개념적 정교화가 중독의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사람이 알코올을 중단한 뒤 한참 지나게 되면, 이제 더 이상 알코올을 좋아(Liking)하지는 않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신체가 그것을 여전히 원하(Wanting)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Liking은 주로 뇌 안의 아편(Opioid)계열 회로와(흔히 말하는 엔돌핀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아편 계열에 속한다), Wanting은 도파민(Dopamine)회로와 관련돼 있다. 이 두 개는 서로 상호작용하긴 하지만.. 2020. 12. 20. 호르몬의 노예 "완전 호르몬의 노예지 이게 뭐야" 아내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평소 아내는 흔히들 말하는 월경전 증후군이 심했다. 그날이 왔다는 것을 내가 더 빨리 알아차릴 정도였으니까. 어딘가 좀 날카롭다 싶으면 일주일 뒤 어김없이 그날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랬던 아내가 이제 임신을 했으니 결과는 뻔하지 않겠나. 요동치는 호르몬에 맞추어 아내의 상태도 하늘과 땅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평소라면 농담으로 받아칠 말에 갑자기 발끈하는가 하면 갑자기 나에게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한다. 나는 직업정신을 발휘해 우울해하는 아내를 위로해주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호르몬의 노예라는 표현은 적절한 것일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의 정신의학은 인간 정신의 상당한 부분이 생물학적인 것에서 기인한다고 .. 2020. 12. 17. Uncharted 4라는 게임 라는 경험 이전에 스필버그 영화에서 나타나는 Awe(경이)라는 감정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 추억해보면 확실히 그의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그 특유의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처음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이었는데, 당시에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엄청난 '무엇'에 압도되어 극장을 나왔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를 보며 경험했던 것들에도 비슷한 요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가령 존스 박사가 처음 알렉산드레타의 초승달 모양 협곡에 도착했을 때라든지, 성배가 위치한 페트라 신전에 도달할 때의 그 경이감 같은 것 말이다. 어린시절의 나는 그 감정을 반복하고 싶었다. 나와 친구는 동네 놀이터를 돌아다니며 보물지도를 작성하고, 엑스표시를 한 뒤, 다음 번에는 여기를 탐방해보자고 기약.. 2020. 11. 11. 나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너를 만났는가 이전에 '번역' 또는 '기원과 다른 결과'에 관해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특정한 의도를 갖고 있음에도 사태가 전혀 의도와 상관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현상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오늘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건을 경험한 게 있어 기록해본다. 우리 병원은 매주 수요일 오전 임상심리사들과 함께 세미나를 진행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맨 앞자리에 앉아 발표를 듣고 있는데 어디서 익숙하면서도 매력적인 향기가 났다. 나는 마들렌을 씹은 사람 마냥 갑자기 알 수 없이 과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한다. 20대 때의 여자친구가, 그녀의 생일에 줄 향수를 고르느라 전전 긍긍하던 시간이, 애틋하고도 이루어지지 못한 절절한(그러나 실상은 걍 차이고 끝난) 사랑이 떠오르다가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아뿔싸! 하고 .. 2020. 11. 11.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