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 정신의학에서 핫한 개념들 중 하나가 '좋아함(Liking)'과 '원함(Wanting)'이라는 개념이다.
다분히 철학적인 냄새가 풍기는 개념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개념적 정교화가 중독의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사람이 알코올을 중단한 뒤 한참 지나게 되면, 이제 더 이상 알코올을 좋아(Liking)하지는 않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신체가 그것을 여전히 원하(Wanting)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Liking은 주로 뇌 안의 아편(Opioid)계열 회로와(흔히 말하는 엔돌핀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아편 계열에 속한다), Wanting은 도파민(Dopamine)회로와 관련돼 있다. 이 두 개는 서로 상호작용하긴 하지만, 독립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아편계 회로에서는 '이제 술을 더이상 원하지 않아', '술을 봐도 쾌락을 느낄 수 없어'라고 느끼더라도, 도파민 회로에서 '아 난 저 술을 갈망해!'라고 느끼는 경우, 중독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다.
#2.
나는 이 개념화가 두가지 측면에서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본다. 첫째는 그것이 철학적 개념과 신경과학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옛날에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그 유명한 논문에서, '죽음충동(혹은 욕동)'이라는 해괴한 개념을 도입한 바 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생명체는 내재적으로 죽음을 향한 경향을 본능처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말에서부터 느껴질 수 있듯이, 이 개념은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좀 거칠게 말하면, 이 개념을 중심으로 프로이트의 후계자들의 경로가 크게 둘로 나뉘었다고 봐도 될 정도다.
가령 멜라니 클라인 같은 사람들은 이 죽음충동 개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결국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혹한 공격성과 파괴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반대쪽에서는 그런 해괴한 논리는 집어치우라고 하면서, 자아(Ego)의 기능들에 더 집중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아직까지도 죽음충동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철학 쪽에 대한 영향을 보자면, 영미계통 철학자들은 대체로 이런 해괴한 개념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대로 대륙철학 쪽에서는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개념이 얼마나 그들을 매료시켰는지,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철학자들 대부분이 한 번씩은 이 죽음충동을 건드렸다고 봐도 될 정도다.
죽음충동 개념이 매력적인 것은, 그것이 모든 의식과 의지 또는 합리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의지에 반하는 경향을 그 스스로 내적으로 갖고 있다니 이 얼마나 큰 모순이란 말인가! 가령 인간은 어째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기 스스로를 이끌어갈 수 있단 말인가?
물리학에서야 가끔 그런 일이 있어왔지만, 생명과학은 언제나 형이상학을 다루는데 어려워했다. 기껏해야 진화론 같은 것이 철학의 이름표를 달고 자신의 영역을 넘어갔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Wanting을 Liking으로부터 분리하고, 그것에 고유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해주려는 현대 정신의학의 경향은 상당히 흥미롭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신경전달물질과 뉴런의 이름으로 자가당착적인 '충동'의 측면을 건드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중독의학'이라는 분야가 갖는 형이상학적인 의의가 상당히 많은데 (가령 정신분석학에서 '상호의존성'이라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경계를 허물게 해준 개념은 중독의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이 '물질'과 맺는 관계를 분석하던 와중에, 그것이 치료자와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뤄보겠다)
#3.
둘째는 윤리적 측면에서의 시사점이다. 정신의학 그 자체는 항상 윤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강제입원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 개인의 기본권을 제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Wanting과 Liking의 구별이 여기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것인가.
사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법 정신의학은 '판단력'이라는 것을 기준점 삼아 치료의 강제성을 부여할지 말지 결정하는 노선을 택했다. 가령 누군가 타인을 해하거나, 혹은 자신을 해하는 행동을 했을 때, 그가 '자유의지'를 온전히 발휘할 만큼의 판단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그의 행동을 어느 정도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식이다.
문제는 판단력이 전혀 문제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가령 계속해서 손목 자해를 하는 청소년을 두고, 우리는 단순히 그가 '판단력의 결여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누군가가 "나는 추후 10년간 OOO의 노예로 살겠다"라는 계약에 자발적으로 응했다면, 그 또한 그의 판단력이 문제돼서일까?
'자유' 개념을 중심으로 구속력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우리는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고 배운다.
누스바움 같은 사람이 '분개'와 '혐오' 개념을 구별하려고 애를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녀는 그저 '아 보기 싫어!'라고 하는 혐오를, '가서 쟤를 때려야겠어!'라고 하는 분개와 구별하고, 후자에 대해서만 법적 강제권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개념에 은근슬쩍 '우리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끼어들게 된다. 즉 우리가 자유롭게 어떤 행위를 할 때는, 그것을 좋아서 하는 것이고, 그렇게 좋아서 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마땅히 그것을 제한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원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면, 그의 행동은 어디까지 제약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의 자유의지일까. 문제는 끝도 없이 미궁으로 빠져든다.
나는 여기서 진정으로 문제되는 것이 바로 Wanting과 Liking의 대립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판단력이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요상한 충동'을 내재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 신경생물학에서 과학적 근거의 기반을 마련하고, 결국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그에 대한 과학적 논의가 개진된다면, '자유의지'와 관련한 우리의 윤리체계와 법학은 어떻게 발전되어 나갈 것인지.
여러가지로 기대되고 또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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