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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나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너를 만났는가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0. 11. 11.


이전에 '번역' 또는 '기원과 다른 결과'에 관해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특정한 의도를 갖고 있음에도 사태가 전혀 의도와 상관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현상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오늘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건을 경험한 게 있어 기록해본다. 우리 병원은 매주 수요일 오전 임상심리사들과 함께 세미나를 진행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맨 앞자리에 앉아 발표를 듣고 있는데 어디서 익숙하면서도 매력적인 향기가 났다. 나는 마들렌을 씹은 사람 마냥 갑자기 알 수 없이 과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한다. 20대 때의 여자친구가, 그녀의 생일에 줄 향수를 고르느라 전전 긍긍하던 시간이, 애틋하고도 이루어지지 못한 절절한(그러나 실상은 걍 차이고 끝난) 사랑이 떠오르다가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아뿔싸! 하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세미나가 끝난 뒤 그 심리사에게 다가가 묻는다. 
선생님 혹시 랑방 향수 쓰시나요? 
아 향수 냄새가 너무 많이 퍼지나요? 
심리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을 붉힌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구요 하하 익숙한 향이 나서... 그거 잔느죠? 어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 왜 제일 유명한 두 개 중 하나잖아요. 잔느랑 또 하나... 뭐였더라...
에끌라 다르페쥬요?
아 맞다 그거요 ㅋㅋ 그거 왜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향수라잖아요? 하하

이게 별 의미없는 사건일 수도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최근 '공유 영역'이라고 부르는 (내 맘대로 만들어낸) 어떤 개념에 꽂혀 있는 상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역은 완전히 이질적인 둘 이상의 개인의 정신 역동이 중첩되면서 새로운 의미가 창발되는 장소다.

나의 사례를 뜯어보면 두 사람의 역동이 이질적이라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향수의 향기가 퍼졌다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향기를 맡고 내가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그 향기의 '이름을 맞추고 싶다'는 욕구였다. 나는 어디를 가든 항상 '나 그거 기존에 알고 있었어'라며 아는 척을 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나르시시스틱한 동기가 온전히 반영된, 정말이지 나만의 독특한 반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심리사 분은 어딘가 화장이나 옷차림 같은 데가 세련된 면이 있어, 항상 시선이 쏠릴 수 밖에 없는 그런 면이 있는데, 오늘은 눈이 아니라 코까지 쏠린 사태가 벌어졌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내가 총각이었으면 이 사태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잠시 해본다. 가령 "향기가 거기까지 퍼졌나요?"라는 중립적인 문장에 대해 내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향수의 이름이 뭔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보다는, 그 향기가 선생님과 잘 어울린다든지, 원래 그 향수를 좋아하시느냐든지, 아니면 쓸데없이 오! 나도 그 향수 좋아하는데 선생님도 그 향수 좋아하시나봐요?라면서 작위적인 공통 관심사를 만들어보려는 하등의 노력 같은 게 있을수도 있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소설을 써본다고 했을 때, 그 분이 발화한 문장이 사실은 중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면, 그리고 내가 그 의미에 공명하면서 부가적인 의미들을 더 붙였다면, 게다가 내가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는 대신 과거 여친과의 추억을 이 분과의 관계성 속에 우겨넣는 식으로 의미화를 벌였다면 이 사태는 어디로 가게 됐을까?

나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화의 사태가 앞서 말한 공유 영역에서 이루어지지 않나 생각한다. 그 영역에서는 두 사람의 동기와 전혀 무관하게 대화의 방향이 흘러갈 수 있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다. 가령 한쪽 사람은 아는 척을 하고 싶어 지식화된 대화를 이끌어나가고 싶은데 대화가 친교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혹은 한 쪽이 대화를 자신과 관련된 주제로 집중시키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 쪽이 감정적 신호를 캐치하지 못해서 대화가 엉뚱하게 현학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냥 친교적인 의도로 던진 말인데, 거기서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잔느라는 이름의 어원은 사실 창립자의 이름에서 따온 거라는 둥, 에끌라 다르페쥬라는 불어의 의미가 어떠어떠한 것이라는 둥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 친교의 목적을 갖고 있던 사람은 당혹감을 면치 못하겠지만...

말이 길었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이 공유영역의 문제가 '대상선택'이라는 문제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대상선택'의 문제야말로 논쟁적인 분야도 없다. 나는 왜 지금의 배우자를 만났나? 나는 왜 지금 이 남친 혹은 여친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왜 그 때 그 사람과는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나? 

고전적인 이론들은 A와 B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진 원인을 A와 B 각각의 정신역동 속에서 찾으려 한다. 가령 나르시시스틱한 self를 갖고 있어 mirroring해주는 대상을 갈구하던 사람이, 우쭈쭈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관계 속에 빠져버린다든지, 오이디푸스적인 갈등을 자극하는 이성을 만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빠져버린다든지, 피학적인 사람이 가학적인 사람을 만난다든지 등등...

그런데 이런 만남의 원인을 A와 B 당사자가 아니라, 두 사람이 만나서 형성되는 영역 쪽으로 끌고 가면 좀 다른 논의를 펼칠 수도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A와 B의 만남을, 단순히 A의 역동과 B의 역동의 '궁합'같은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A와 B의 만남이 만들어낸 C라는 공유영역이 역으로 두 사람을 옭아매면서 몰아가는 메커니즘으로 설명해볼 수 없겠냐는 것이다.

C에는 다양한 것들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내가 경험한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대화의 주제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데 두 사람의 의도나 욕구 혹은 과거 경험 같은 것들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 외에 당시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라든지, 두 사람의 직업적인 위치, 그 대화가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인 맥락, 주변 사물들(가령 '향수'와 '향기'라는 사물적인 존재는 분명 그 안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겠나.

"너와 내가 연인이 된 이유는, 그 때 그 향수 때문이었어"라든지, "그 때 그 식당에서의 은은한 조명과, 트럼프의 낙선이 우리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줬어"라는 논의 안에서 향수나 조명, 트럼프 같은 것들은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치환 가능한 요소들이 아니다. 당신이 클럽의 조명빨에, 구두 속의 키높이에 '속아서' 참 모습의 애인을 못 알아본 게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을 배제한 순수한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없다. 오히려 조명과 키높이 구두는 당신의 애인을 애인이라는 범주로 가능하게 한 진짜 원인이다.

그나저나 아까 끝까지 아는 척을 하지 못한 게 마음 속에 걸린다. Eclat d'Arpege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르페지오 안에서 느껴지는 음율적인 강세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클래식 '아르페지오' 향수에 대한 어떤 명성을 이어가겠다는 뜻인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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