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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72

유비 우리는 '유비'를 조금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유비를 사용해 세계를 재현해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개의 얼굴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스마트폰의 소프트웨어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들의 두뇌를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유비를 하나의 이해의 틀로서 간주한다는 것을 넘어, 유비를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강조되고 있지 않다. 인간이 유비에 입각해 세계에 적응해 간다는 사실 자체는 그들이 유비에 입각해 세계를 이해하고 재현한다는 것을 분석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우리는 나무 껍질의 패턴에 자신의 몸 색깔을 맞추어가는 나방처럼, 언제나 우리 주변의 사물들의 결에 맡게 자신의 색깔을 바꾸고 모양을 바꾼다. 2021. 3. 19.
자화상 자화상 자화상을 그린다 하면 자신의 얼굴의 재현물을 그리기 마련이다. 나의 실재를 담기 위해 나의 거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나의 얼굴에 도달한 빛이 한 차례 거울에 가 닿고, 다시 거울에서 반사된 빛이 그림으로 옮겨지는 식의 이중의 반사 과정이 관여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의 실재함이 꼭 나의 거울상으로서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일까? 가령 나는 나의 시선이 바라보는 세계, 나의 시선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 그 자체를 캔버스 위해 그려냄으로써 나의 자화상을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일까. 2021. 3. 19.
말해지지 않은 것이 말해주는 것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말해주는 것들 언어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전달되면서 소통의 기능을 수행할 때 '비언어적 소통'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바디 랭귀지나 표정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인간의 얼굴이나 몸짓을 매개로 등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소통이 사물을 경유해 나타나기도 한다. 운전을 하다보면 깜빡이를 켜지 않았는데도 '웬지 이쪽 차선으로 넘어올 것 같은' 차들을 보게 된다. 운전을 많이 한 사람들은 어떤 감각 같은 게 생겨서, 차의 미세한 태세(posture)를 보기만 해도 그것이 뭔가 이쪽으로 넘어올 것 같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표현이나 소통이라는 것이 무어길래, 우리는 그깟 자동차의 태세만으로도 어떤 메시지를 얻게 되는 것일까. 언어를 넘어.. 2021. 3. 17.
무의식이 말을 하게 하는 법 무의식이 말을 하게 하는 법 정신치료자의 큰 목표 중 하나는 환자가 말하지 못하던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즉 '그것(es)'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뇌 안에 있을까? 그러나 치료실 안에서 일대일로 마주 앉아 '그것'에게 말을 걸고자 하는 치료자의 노력은 종종 실패하고 만다. 줄곧 말을 하지 않던 한 소녀가, 며칠 전 처음으로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입원실의 다른 또래들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말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그것'은 치료 공간이 아닌, 또래들과의 어울림이라는 맥락 안에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와 그녀 사이에서 작동하지 않던 말하기의 기능이, 그녀와 또래 사이에서는 활발히 작동하고 있었다. 이후 나는 그것을 이용해 매우 용이한 방식으로 그.. 2021.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