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은 가치를 모른다
사변적인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행동주의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랬다. 그들의 사유가 종종 빈약하고 공허하며 피상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전문의 시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행동주의 공부를 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그들의 사유가 시사하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행동은 가치를 모른다 - 이것은 내가 새로 배우게 된 몇 가지 깨달음 중 하나다. 나는 행동주의를 통해서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던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행동'을 '정신적 가치'와 분리시키지 못한다. 가령 내가 당신을 때리는 것은 당신을 미워해서이고, 내가 어떤 것을 먹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유들에서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벌이든 간에 거기에 항상 어떤 인간적 '가치'랄지 '동기'같은 것이 끼어든다.
'강화(Reinforcement)'와 관련해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재밌는 사례가 있다. 어떤 아이가 쇼핑몰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아이가 떼를 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이것을 가치의 문제로 풀어낼 경우, 해결책이 상당히 복잡해질 수 있다. 이 아이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해, 이 아이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그런 욕구에 대해 부모가 어떤 가치를 갖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면서 해결과정은 점점 복잡해져 간다.
그렇지만 실제로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 중 하나는, 단순히 아이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강화 모델에 따르면, 우리가 아이를 혼내든 혼내지 않든, 어쨌든 아이의 행동에 대한 개입을 많이 하면 할수록 아이의 행동은 점차 보상을 받고 강화된다. 아이를 훈육하냐 방임하냐, 혹은 아이의 가치를 존중하냐 존중하지 않냐 하는 가치의 문제는 전혀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행동주의 모델의 깔끔함과 우아함은 바로 그런 곳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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