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번역(transl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항상 어떤 고정적인 판본들이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어떤 철학서에는 원전이 있고, 그에 대한 번역물이 있다. 번역에 대한 관점이 문헌학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의 연료는 엔진 속 크랭크와 실린더를 거쳐 바퀴의 운동으로 번역된다. DNA는 RNA를 거쳐 단백질로 번역(translation)된다. 정신과 의사는 언제나 환자의 말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개입(intervention) 방식을 마련한다. 이런 관점들에서는 언제나 번역이라는 과정 이전에 '번역이 되는 어떤 것'이 상정되곤 한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번역이라는 과정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닐까?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중 번역을 거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하물며 우리의 신체가 세계를 가장 처음 '맞댄다'고 여겨지는 1차 감각기관들은 세계를 접하자마자 '번역'의 과정을 거치게 돼 있다. 말하자면 감각기관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척수를 따라 뇌의 체성감각피질(somatosensory cortex)로 향하는 신경 전달 경로를 통해 어떤 '감각'을 느끼는데, 이런 감각들은 그것이 뇌에 도달되기 전 '이미' 어떤 필터링을 거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저 '세계'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은 그 '세계'를 통증, 온도, 날카로움 등의 범주로 '분류'한 뒤 그것을 뉴런의 전기 신호로 '번역'해 뇌로 올려보낸다. 여기서 무엇이 원본인가? 세계는 원본이고, 뉴런의 전기 신호는 다만 그것을 번역한 모스 부호 따위에 불과한 것일까?
환자를 면담하다보면 이런 번역의 개념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최근 상호주관성 이론(이 이론에서는 의사와 환자의 주관성 모두가 대화 과정을 거쳐 '구성'된다고 말한다)에서 접한 개념 중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바로 '주인을 찾지 못한 말'이라는 개념이다. 분석 과정 중에 환자의 무의식이 드러나게 되면, 환자는 자신의 것인지 알지 못하는 '어떤 말'을 하게 되는데, 그 말은 잠시 주인을 찾지 못하고 의미를 가지 못한 채 허공을 배회하게 되다가, 결국 두 사람의 상호주관성이 성립되는 과정 중에 어떤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미란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가고, 그런 과정에서 환자의 주관성이 변화를 겪는다. 어쩌면 이 '주인을 찾지 못한 말'은 '번역되지 않은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번역 개념이 유의미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환자와 의사 또는 환자와 환자의 가족 사이를, 즉 인間 너머 사물에까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언제나 개와 대면하며 번역을 거치고, 스마트폰을 대면하며 또다시 번역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우리의 정동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운동하는 것은, 언제나 이렇게 세계를 대면하는 과정 중의 번역 안에서 생겨난다...
공부는 안 하고 잡생각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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