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멜랑콜리라는 불 - 선물인가? 저주인가?
8,90년대의 하이틴들을 사로잡았던 주말 드라마들의 내러티브를 분석해 보건데, 비교적 많은 작품에서 글빨이 좀 있는 캐릭터들은 어딘가 음울한 구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하숙집 딸의 어트랙션을 끄는 가난한 하숙생 오빠는 항상 어딘가 우수에 가득찬 눈을 하고서 하늘의 한 점을 응시하는가 하면 갑자기 뭐가 생각나는 듯 뭔가를 종이에 끄적거리다가 에잇! 내 작품은 엉망이야! 라고 하면서 하필이면 하숙집 딸의 시야 내부로 그 종이 쪼가리를 던지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럼 하숙집 딸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그 쪼가리를 펴보고는 오빠의 글 실력에 감탄, 오빠를 짝사랑하게 되는 그런... (물론 필자는 8,90년대 당시 하이틴이 아니었기 때문이 이 모든 분석에 과학적 에비던스는 실로 전무하다는 것을 밝히는 바이다.) 왜 그 하숙집 오빠는 멜랑콜리할 수 밖에 없는 걸까. 감정이 풍부해서?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른 새벽 풀잎사귀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고서 경이로움에 휩싸여 전율을 느끼고 있는 남성을 묘사하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분명 단순히 감정의 풍부성을 표상하는 목적으로서 멜랑콜리가 도용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암묵적 신념이 깔려 있으니 - 예술가들은 어딘가 우울한 구석이 있다 - 이런 생각은 비단 우리 시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는가보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서 우리는 우울한 기질과 예술적, 혹은 학문적 재능 사이에 연관성을 맺으려는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다. 멜랑콜리라는 불이 가진 위대한 힘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관심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더욱 꽃을 피게 되는데, 이를테면 피치노(1433 ~ 1499)의 경우 당시까지 멜랑콜리에 대해 사람들 내부에 존재했던 개념들, 이를테면 나태함이라든지 악함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측면들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멜랑콜리는 중세 이전까지는 부정적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메디치가의 후원아래서 고전 문학을 부흥시키는데 애쓴 피치노가 멜랑콜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토성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여러 문헌과 자료를 임상적으로 수집하고 분석한 결과 피치노는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태만, 무관심, 음울함, 졸음”과 같은 부정적 의미의 대명사였던 멜랑콜리에 “지적인 관조, 침잠, 지성과 사색”등의 요소를 추가했다. 피치노의 주장에 따르면, 멜랑콜리 체질인 사람은 광기에 사로잡힌 헤라클레스와 같은 상태에 처하거나, 내면적-정신적 집중력으로 인해 더 높은 사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천재나 광인으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의 견해는 “철학, 정치, 문학, 예술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뛰어난 인간들은 멜랑콜리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나 멜랑콜리의 긍정적 요소를 강조하여, “우울함이 천재를 낳게”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멜랑콜리아 I‘에 나타난 예술과 기억 - 아비 바부르크와 페터 바이스의 분석을 중심으로> - 조한렬 한편 피치노와 동일한 시기를 살았던 뒤러는 그의 작품에 제목에 대놓고 <멜랑콜리아 I>이라는 이름을 걸어줌으로써 그것의 존재감을 확연히 부각시키게 된다.
<멜랑콜리아 I> - 알브레히트 뒤러, 1514
뒤러의 이 자그마한 동판화 (실제로 24x19cm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는 후대에 수많은 해석들을 낳게 된다. 그것이 테마로 삼은 소재의 특이성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림 속 요인들이 갖는 도상학적 해석 가능 범위가 매우 열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뒤러의 이 동판화에 대해서는 실로 대단히 많은 해석들이 오고 갔다고 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어째서 멜랑콜리아인가?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멜랑콜리가 맞는가? 중세 시대 화가들이 멜랑콜리적 기질이 갖는 특징들, 그 중에서도 나태함을 기술하기 위해 종종 나른함을 못 이겨 졸고 있는 아낙네들의 이미지를 자주 차용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아마도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아낙네는 왜 다른 아낙네들처럼 졸고 있지 않은 건가? 주변에 널려 있는 컴퍼스, 구, 다면체등을 포함한 수학적 도구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부르크 (1866 ~ 1929) 에 의하면, 뒤러라 처했던 시대 상황 상 새로운 기술과 과학 및 측량의 발전으로 인간의 이성은 꽃피기 시작했지만, 고대적 감성이 사라지지 않고 이성의 발전과 공존하게 되면서 묘한 과도기적 상태를 띄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대적 감성이란 말하자면 글의 앞부분에 소개했던 ‘토성의 영향’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 유럽사회는 기독교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행성신들이나 점성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파노프스키(1892 ~ 1968)의 말마따나, 뒤러의 그림 속에는 이성과 비이성이 충돌하고 있으며 묘한 모순성을 풍기고 있는 것이다. 바부르크는 그림 속 여인의 주변에 널려있는 측량 도구들, 말하자면 “사유의 상징인 컴퍼스”의 존재를 근거로 들어 여인은 단순히 우울한 상태가 아닌, 스스로의 사유 활동에 몰입해 있는 상태라고 분석한다.
‘멜랑콜리아 I’을 문화적 기억과 관련시켜 분석할 때, 근대적 인간의 모습 이외에 눈에 띠는 또 한 가지는 동판화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 점성술적 요소이다. 여자 뒤에는 사투르누스의 기운을 막는다는 유피테르의 마방진31이 걸려있고, 그녀의 머리에는 월계수가 아니라 우울증에 좋은 약초화관이 놓여 있다. 이러한 주술적인 차단 장치들에서, 뒤러가 근대적 인간으로서 해방 투쟁을 시작했지만 고대의 점성술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차단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우울한 이유는 무엇인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고대의 비과학적 사유는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녀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바부르크는 ‘멜랑콜리아 I’이 근대적 의식과 고대의 믿음 사이에서 “내면적, 지적, 종교적 해방을 위해 싸움을 시작”32한 근대적 인간의 자의식을 투영하고 있으며, 미신적-주술적 세계로부터 물러난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고독한 정신적 공간에 대한 비유를 보여주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동판화의 여자는 점성술이 지배하는 현실과 이미 도래한 새로운 과학의 시대 사이에서, 이 교도적 우주론적 숙명론에 맞선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근대인의 불안한 모습인 것이다.
<‘멜랑콜리아 I‘에 나타난 예술과 기억 - 아비 바부르크와 페터 바이스의 분석을 중심으로> - 조한렬
말하자면 그녀의 눈빛의 모호함은 불확실함을 끌어않은 자의 불안함에 기인하는 것이고, 바부르크는 그녀의 눈빛이 그러한 형태를 띌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분석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그치만 사실을 말하자면, 바부르크만큼 체계적인 역사적 지식으로 무장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당최 아무리 그림을 쳐다보고 있노라도 그런 식의 원인 추론은 도출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게다가 무식하면 호기심도 생기지 않는다고, 그 원인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생기지도 않는 바, 이를테면 그게 여기저기 오입질하고 댕기는 남편 때문인지, 곗돈을 갖고 튄 계주의 묘연한 행방 때문인지 알게 무어란말인가? 필자의 수준에서 이 눈빛에 대해 관심있는 바는 이 여인이 ‘왜 멜랑콜리한가?’ 라기보단, 어째서 이 여인이 멜랑콜리한 이유를 찾기 어려운가? 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은 수많은 해석을 낳았던 것이 아닐까. 하나의 범주로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저 눈빛과 태도. 저것은 부정인가? 긍정인가? 우리는 매력적인 여성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미소의 불명확한 의미에 잠자리를 설치는 남정네들의 혼란감과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무표정과 미소의 애매한 중간선을 횡단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그림 속 여인네의 시선은 우울증 환자의 체념과 연구에 전념한 학자의 몰입 사이의 애매한 지점을 가로질러 감으로써 묘한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그림이 멜랑콜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눈빛을 기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멜랑콜리에 이환된 시기에 따라 달라질 텐데, 삽화의 초반이라면 자신을 찾아온 멜랑콜리에 저항하는 눈빛일 수도 있을 것이고, 삽화의 중간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전형적인 게으름이나 우울함을 표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 저것은 심취해 있는 사람의 표정이다. 그녀는 멜랑콜리가 끌고 온 기운의 반동력, 그 에너지에 심취해 있는 것이다.
영화와 연계시켜 생각해보자면, 이는 저스틴이 멜랑콜리아에 대해 갖는 이중적 태도와 관련지을 수 도 있는데, 그녀는 영화 내내 그녀의 몸과 정신을 소진시키는 이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짐, 멜랑콜리를 그다지 거부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거부하는 것을 넘어 반기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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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옷을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Bare하게 그것의 광채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 관능적인 눈빛으로 검지와 중지를 이용, 유방의 윤곽을 부드럽게 훑어 내려가는 그녀의 이 자세에서 성행위의 알레고리를 보게 되는 건, 단순히 필자가 변태이기 때문인 걸까? |
영화 초반 교접에 목말라 수캐마냥 헐떡이는 약혼남 앞에서 지퍼 한 땀 내리지 않던 그녀가 이젠 아예 자발적으로 남성상위 포즈를 취해주는 것이다. 나약한 인간 남성의 크기는 행성 멜랑콜리아의 크기에 비견할 수 없는 것인가. 역시 여자들에 있어 size는 does matter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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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약혼자의 앞에선 좁은문으로 일관하는 그녀. 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
우리는 이처럼 자신을 심각하게 괴롭히는 대상을 부정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저스틴의 태도를 보면서 학창시절 내내 일진들에게 맞고 살면서도 그들과 친하게 지내려 안간힘을 쓰는 3류 소년 깡패들을 보고 혀를 차던 우리의 모습을 되뇌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만약 이 두 가지 상황을 비교함으로써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우리가 3류들을 보면서 그들이 일진들의 딱가리 짓을 벗어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을 맴돌 수 밖에 없는 건 일진들의 막강한 권력에서 떨어지는 콩고물 즉, 앞날의 이득 때문이라고 분석한다면, 뒤러의 그림 속 여인네나 저스틴의 태도를 볼 때도 이와 유사한 분석구도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두 여인에게 있어 3류 양아치들의 ‘이득’에 상응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뒤러의 그림 속 여인에게 그것은 이를테면 ‘사유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저스틴에게 있어서는 ‘카피라이터로서의 예술가적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멜랑콜리 양상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기능적 이점들의 기원을 두 가지 방향으로 추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멜랑콜리 양상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하는 생산성이다. 현대적 개념으로 보자면 양극성 장애 환자들의 조증 삽화에 해당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의 경험을 관조해 보건대 분명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멜랑콜리에는 어떤 강력한 포텐셜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들은 그것을 논리적인 차원에서건 직관적인 차원에서건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이들은 주요우울장애에 이환되었다기보다는 양극성장애에 이환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런 경우 이러한 반동으로서의 에너지를 설명하기 용이해진다.
순수한 주요우울장애의 경우 DSM-IV-TR의 진단 기준에서도 볼 수 있듯, 반드시 조증삽화를 동반할 필요는 없다. 그냥 우울한건 우울한 거다. 다만 환자들 중에는 이환시기 중 양상의 일부로서 우울증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진단명이 양극성 장애로 바뀌게 된다. 양극성장애에는 I형과 II형이 있는데, I형의 경우 조증삽화가 한번이라도 있는 경우 진단이 되고, II형의 경우 한번 이상의 주요우울삽화와 한번 이상의 경조증삽화가 있어야 진단이 내려진다. 자, 그럼 조증삽화의 진단 기준이 어떠한지 한번 짚고 넘어가보자.
조증삽화의 진단 기준 (DSM-IV-TR) |
A. 비정상적으로 의기양양하거나, 과대하거나 과민한 기분이 적어도 1주일 간(만약 입원이 필요하다면 기간과 상관 없이) 지속되는 분명한 기간이 있다.
B. 기분 장애의 기간 도중 다음 증상 가운데 3가지 이상이 지속되며(기분이 과민한 상태라면 4가지), 심각한 정도로 나타난다. 1) 팽창된 자존심 또는 심하게 과장된 자신감 2) 수면에 대한 욕구 감소 (예 : 단 3시간의 수면으로도 충분한 느낌) 3)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거나 계속 말을 하게 됨 4) 사고의 비약 또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는 주관적인 경험 5) 주의 산만 (예 : 중요하지 않거나 관계 없는 외적 자극에 너무 쉽게 주의가 이끌림) 6)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사회적 또는 성적인 활동) 또는 정신운동성 초조 7) 고통스런 결과를 초래할 쾌락적인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 (예 : 흥청망청 물건 사기, 무분별한 성행위, 어리석은 사업투자)
C. 증상이 혼재성 삽화의 진단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는다.
D. 기분 장애로 인한 직업적 기능이나 일상적 사회 활동, 대인관계에서의 뚜렷한 손상을 막고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원이 필요할 정도로 기분 장애가 심각하거나 정신증적 양상이 동반된다.
E. 증상이 물질 (예 : 약물, 남용, 투약 또는 기타 치료)이나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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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상함을 느끼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양극성 장애 I형의 경우 진단 기준에 ‘주요우울삽화’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분명 용어는 ‘양극성’ 인데, 어째서 조증삽화만 있어도 진단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인가? 병태생리학적으로 조증삽화와 주요우울삽화의 경우 유사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으며, 조증삽화를 경험하는 환자의 경우 거의 100% 후에 우울삽화를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단 기준에는 조증삽화만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저스틴이 이처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직업적인 커리어를 잃지 않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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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퀀스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양극성 장애 환자들이 조증삽화 시기에 나타내곤 하는 과한 활동성 및 생산성과 흡사한 형태를 띠는 것으로 보건대, 그녀가 카피라이터로서 직업 생활 중 간헐적으로 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성한 업무력에 대해 일종의 단서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
두 번째는 우울증 자체의 기능적 이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중세 혹은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이 주목했던 것은 조증삽화의 에너제틱한 측면이라기보다는 우울한 사람들의 차분하고 가라앉은 기분상태,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되는 내부로의 함입 혹은 자기 몰입성의 차원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현대까지 우울증을 앓아왔던 모든 예술가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을 예정이라면 이 두 번째 차원도 충분히 논의 대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분석의 대상을 저스틴, 또는 뒤러의 그림 속 여인으로만 한정했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 또한 양극성 장애로만 한정했다.
5. 예술로서의 멜랑콜리, 현실에서의 멜랑콜리
영화, 그리고 동판화 속 멜랑콜리아는 우리에게 동경 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탐미적인 시선이 유지되고, 실리적 이득의 여부를 떠나 그 광활하고 푸른 행성은 관객들에게 숭고한 아름다움마저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몰입하게 되는 경우 저스틴과의 혼연일체를 경험하기까지 이르는데, 필자는 저스틴을 보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고수부지로 달려나가 빤스를 벗어던지고 온몸으로 달의 기운을 받아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처럼 멜랑콜리에 대한 느슨하고 안이한 태도는 픽션 속에서만 유지 가능한데, 이유는 우리가 영화에서 그녀를 볼 때 그녀가 양극성 장애에서 치료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를 두고 영화의 결말의 좋고 나쁨을 판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보다 그녀의 멜랑콜리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에서 멜랑콜리, 즉 우울증에 대한 탐미적 태도는 고수부지 빤스 탈의의 현실적 개연성만큼이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 현실에서 매체를 통해 마주치는 우울증의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우울증은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이환률은 매년 늘어나고 있으며 국가에서는 이제 정신과가 아닌 일반 의원에서도 우울증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법령을 수정하기까지 이르렀다. 우울증은 누구나 앓을 수 있는, 흔하지만 너무나도 위험한 질병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작게는 개인의 파멸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전 국가적 차원에서의 생산성마저 크게 무너뜨리게 된다. 이처럼 우울증의 병리적 특성이 강조되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멜랑콜리에 대한 동경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 위험한 태도가 아닐까? 목을 매거나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군상들을 보면서도 동경과 찬사의 태도를 유지한다는 건 너무나도 비인도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과거 문학, 예술, 철학의 소재였던 멜랑콜리는 현대로 들어와 우울증이라는 의학용어로 얼굴을 바꾼 채 의학과 생물학의 테두리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으로부터 병리학적 의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찾아보기는 힘들게 되었다.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신 병리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심화되었고, 병리에 대한 이해는 정상에 대한 이해 및 규정을 강화하였다. ‘정상성’의 규정은 자연스럽게 그 정상성으로의 회귀를 의무화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학의 도움을 빌어 어느 정도 정상적인 레벨의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제 우울증은 거의 非정상의 범주로 예속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의 신비로움도, 경이로움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퇴치해야 할 대상이다. 미국의 작가 Susan Sontag이 썼듯, “우울증은 멜랑콜리에서 그것의 매력을 뺀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영화 <멜랑콜리아>는 이처럼 이미 하나의 범주 속에 예속되어 규정되어버린 멜랑콜리의 개념을 다시 꺼내와 미규정 상태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저스틴의 눈빛 만큼이나 해석하기 모호한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이 영화적 공간 내에서 더 이상 그것은 과학적 분석 혹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은 병리가 아니다. 다시금 신비롭고 우아한 대상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임상의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악으로 치부되어 이리저리 욕만 얻어먹어 너덜너덜 누더기가 되어버린 멜랑콜리가 다시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고상하고 우아한 모습을 되찾는 것을 보며 야릇한 쾌감에 젖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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