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하의 몹쓸 년, 저스틴
|
영화는 초반부터 대단히도 묵시론적인 시퀀스를 선사한다. 흡사 참새 닮은 조류 몇 마리가 봄날 벚꽃 잎 마냥 흐드러지게 떨궈지는 석양 배경아래 커스틴 던스트의 흐리멍텅한? 눈빛이 보인다. 천하장사도 못 드는 풀이 눈꺼풀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양안이 채 절반도 드러나지가 않아 시선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게다가 머리칼은 1교시 수업 출석부 호명 전에 간신히 도착한 어느 여대생의 그것마냥 제대로 마르지도 않은 채 그야말로 축 걸쳐져 있어 시선의 흐리멍텅함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저 눈은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가? 분명 나를 보는 건 아니다. 내 오른쪽 어깨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초점은 물체를 향하기보단 어느 공간 혹은 허공을 향해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저 시선과 표정은 어떤 감정 상태에서 유래한단 말인가? 단초는 미간의 저 미세한 주름에 있다. 미간의 주름이 아니었다면 저 눈을 의식을 잃은 자의 그것이라 판단했으리라.
주름의 깊이와 강도로 판단해보건대, 저것은 30% 정도의 피로와 20% 정도의 무기력, 그리고 50%정도의 짜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짜증의 기원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곧 그녀의 눈을 살핀다. 애교살 아래 색소의 침착 정도로 보아 분명 그녀는 수면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수면부족과 피로 그리고 무기력이라... 아아... 이것은?!!
주요우울삽화의 진단 기준 (DSM-IV-TR) |
① 거의 하루 종일 우울증을 보임 : 주관적 설명(예: 슬프거나 공허함)이나 타인에 의한 관찰(예: 눈물을 글썽임)에 의해 거의 매일 마다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이 보임 ② 주관적 설명 또는 타인에 의한 관찰로 거의 매일 마다 하루 대부분의 활동에서 흥미가 현저하게 감소됨이 나타남 ③ 식이 조절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체중 감소 또는 증가가 나타남 (예: 1개월에 체중의 5% 이상 변화) 또는 거의 매일 식욕의 감소 또는 증가가 보임 ④ 거의 매일 불면 또는 과수면 ⑤ 거의 매일 정신운동 흥분 또는 지체 (단순히 안절부절 못하거나 느려진다는 주관적 느낌뿐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도 관찰이 가능) ⑥ 거의 매일 피로 또는 에너지 상실 ⑦ 거의 매일 단순한 자기 비난이나 아픈데 대한 죄책이 아닌 무가치감 또는 과도하고 부적절한 죄책이 보임(망상적일 수도 있음) ⑧ 거의 매일사고와 집중력의 감소, 결정 곤란을 보임 (주관적 설명 또는 타인에 의해 관찰됨) ⑨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님), 구체적 계획이 없는 반복적인 자살 사고 또는 시도나 자살을 자행하려는 구체적 계획
2) 증상은 혼재성 삽화(조울증에서 조증과 우울증이 공존하는 경우)의 기준에 맞지 않아야 한다.
3) 증상은 임상적으로 의미있는 고통을 일으키거나 사회적, 직업적, 다른 중요한 기능 영역에서 손상을 일으킨다.
4) 증상은 남용 약물, 치료 약물과 같은 물질에 대한 직접적 생리적 효과나 일반적인 의학적 상태(예: 갑상선 기능 저하증)때문이 아니어야 한다.
5) 증상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별로 더 잘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즉,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나서 증상은 2개월 이상 지속되며, 현저한 기능적 손상, 무가치감에 병적 집착, 자살 의도, 정신병적 증상, 또는 정신운동 지연의 특징이 있다.
|
(DSM IV 주요우울삽화 진단기준; 그녀는 5개 이상의 진단 기준을 충족시키고 있따!!)
비슷한 주제로 시간을 조금만 거꾸로 올라가보자.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을 구성하는 체액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더랬다. 혈액과 점액, 그리고 담즙과 흑담즙. 그는 이 4가지가 적당한 비율로 섞여 있지 않고 어느 하나가 많거나 적으며, 지배적인 체액에 따라 인간의 기질이 결정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은 후에 갈렌(AD 130~ AD 200)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의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밀렵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간파할 수 있겠지만, 담즙이란 담에서 나온 즙, 말하자면 간 아래 대롱대롱 달려 있는 쓸개라는 곳에 저장되는 쓰디쓴 액체를 지칭한다. 쓸개는 Cholecyst라고도 불리는데, 그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오십 번 정도 거슬러 올라간 정도의 뻘인 고대 그리스인들은 담을 지칭할 때 Chole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멜라닌 색소처럼 까만 ‘흑’을 지칭하는 melan 에 ‘담’을 지칭하는 chole를 붙여 melancholy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게 됐는데, 이 멜랑꼴리한 체액이 우세한 사람들은 대체로 만사에 우울하고 무관심한데다가 나태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인의 우울증과 상당부분 교집합을 갖는다.
|
극 초반 그녀는 한껏 들뜬 하객들 사이에서 혼자 이렇게 억지 웃음이나 지으며 분위기 맞춰주다가 이내 지쳐버려 방으로 들어와 그냥 드러눕게 된다. |
|
결혼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어! ㅅㅂ... |
토니 스타크 뺨 때릴 만큼의 거액으로 피로연을 준비한 언니 클레어는 이토록 협조 안되는 여동생 때문에 극중 내내 곯머리를 앓는다. 케잌 커팅할 시간이 됐는데도 내려오질 않는 이 죽일 놈의 동생을 직접 찾아 올라간 언니에게 저스틴은 말한다.
|
“진흙 실타래만이... 여기 있어... 내 다리에 매달리며...” |
이렇게 자기 피로연을 코앞에 두고 지상 최대의 나태함과 무책임함을 남발하는 저스틴을 보면서 우리는 그녀가 DSM-IV-TR의 진단기준 뿐만 아니라 고대적 의미의 멜랑콜리 양상까지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말하자면 그녀는 감히 말하건대 멜랑콜리의 화신이라고 봐도 좋겠다.
|
<게으름뱅이의 천국> ; 피터 브뤼겔 (Pieter Bruegel the Elder) 굶주림이 없는 나라 ‘코카인(Cockaigne)’ 속 군상처럼, 침대에 누워 손 하나 까딱 안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언니 클레어는 복장이 터진다. |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망할놈의 '우울감'을 온 세계에 천명하기 위해 당당하게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것인가 하면 꼭 그렇다고 볼 수 만은 없다.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 멜랑콜리아를 소개하겠다.
|
캡틴 플래닛을 비롯한 만화 영웅들이 허구헌날 푸른지구를 지키러 왔다고 떠들어대서 그런 건진 몰라도 우리는 무의식중에 푸른 것=지구를 동일시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초반에 행성의 아이덴티티에 큰 혼란을 겪은 것으로 보이는데, 크고 푸르른 게 지구가 아니라 멜랑콜리아다. |
지구의 직경이 대략 12756km, 말하자면 시속 100km의 자동차를 타고 쉬지 않고 달렸을 때 대략 120시간이 걸리는 만큼의 거리라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이 행성의 크기가 가히 얼마나 무지막지한 것인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여기서 만약 영화가 이 행성이 가진 육중함의 정도와 저스틴이 가진 증상의 강도 사이에 적어도 눈꼽만치라도 연관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면, 우리는 최소한 그녀의 증상을 대할 때 그것이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을만한 성질의 것은 아닐 거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지구가 자기 직경의 5배를 넘는 저 거구의 행성을 버텨내기가 지극히 버거워 보이는 것처럼, 어쩌면 저스틴도 자신을 찾아온 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괴롭힘에 전전긍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스틴이 짊어진 짐을 일종의 기독교적 뉘앙스로 시련이라 한다면,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보다 이해 가능한 것으로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그 중압감의 기원을 어디론가 투사시켜야만 한다. 아마도 현 시대를,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위대한 미합중국의 시민으로서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저스틴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투사 공간은 아마도 생물학이나 과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속에서 저스틴의 감정의 기원에 대한 투사공간은 우리가 익숙해하는 과학의 그것이 아니라, 행성이라는 거대한 자연물의 집합에 해당되는데, 이 점에 대해 더 생각해보자.
2. 행성으로의 투사
개인이 통제 가능하며 개인의 의지를 통해 해결 가능한 자잘한 문제들의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의 화살을 완전히 내부로 향하게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테면 현대의 의사들은 당뇨가 조절되지 않아 혈관 합병증이 유발된 환자의 원인을 그 환자 스스로의 생활습관, 혹은 유전적인 문제로 설명하고, 갑작스레 살이 썩어 들어가는 요상한 병의 원인을 작은 미생물의 침범으로 돌린다. ‘생물학의 장’ 안에서만큼은 이 문제들이 적절히 해석되고, 분석되며,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해결이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해결의 방향성이라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 통제 불가능하고, 해석 또한 불가능하며, 그것의 의지를 인간의 내부로 귀인하기 어려운 문제의 경우 그것의 기원을 상징화된 질서의 외부로, 즉 언제나 여집합으로써만 존재하는 바깥 공간으로 투사시키는 것이 더 용이할 수 있다. 상징화 되지 않은 공간의 사건은 해석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그렇기에 해석을 해야 할 의무 또한 부과되지 않는다. 게다가 통제가 불가능한 만큼 인간으로서는 말없이 조용히 순응하기가 더 쉬워진다. 또한 기원이 바깥으로 투사됨과 동시에 책임 또한 외부로 투사되어 상징 질서 속에는 어떠한 의무감도 남지 않아 심적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
알다시피 고대에는 단순히 열이 나고 기침과 가래가 동반되는 질환마저도 다룰 수 있을만한 적절한 장이 구성되어있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 장의 공간을 해와 달 혹은 자연신 같은 것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고대인들은 인간이 표출하는 이상 증후 가운데 광기를 가장 다루기 어려워했던 것 같다. 때문에 광기는 언제나 악마와 마녀 혹은 신내림과 같은 개념과 연계지워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멜랑콜리아도 큰 범주의 광기에 포함된다고 볼 때, 이 또한 그들로서 무척이나 다루기 어려운 문제의 하나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고대 점성술사들은 흑담즙의 기질이 토성의 기운에서 유래하는 거라 해석했었더란다.
|
|
멜랑콜리아의 푸른 사진과 토성의 비교 사진. 두르고 있는 띠가 없을 뿐이지, 피부 색깔이나 크기로 봤을 때, 대체로 토성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바이다. 잠시 썬캡을 벗어던지고 지구로 달려온 토성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
별이나 해 혹은 달에 대한 자연 숭배적 전통에 입각해 생각해 봤을 때 당시로서 토성이라는 존재는 멜랑콜리의 기원을 투사시킬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광기를 행성의 의지와 연관짓는 전통은 꽤나 오래 지속된 것 같다. 이를테면 한 때 서구세계에서는 살인자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시각과 달의 운동 사이에 어떠한 수치적 연관성을 규정지으려는 노력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친 사람을 Lunatic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사고 실험을 해보자. 멜랑콜리의 개념이 중세 시대에 처음 발견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발현을 누구의 탓으로 돌렸을 것인가? 시대적 정황으로 보자면 기독교적 유일신이 아니었을까? 레비 스트로스적 감성을 버무려 말하자면 통제 불가능한 어려운 난제를 상징 질서 외부의 여집합의 공간으로 투사하는 기전 자체는 시대를 막론하고 유지되며 단지 그 형태나 양상은 당 시대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형된다고 볼 수 있는데, 고대의 환원 대상은 시대적 정황상 우리에게 익숙한 유일신의 모습을 갖기 보단 고대적 센스에 걸맞는 토성이라는 자연물의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뭐 이런 말이다.
영화는 이처럼 과학과 물질이 신화되는 21세기의 한 가운데서 아주 오랫동안 어느 다락방 구석의 먼지 쌓인 궤짝 안에 묵혀져왔을 고대적 감성을 끄집어내 줌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누구 말마따나, 정말이지 고전 속에는 현대에 써 먹을 아이템들이 무궁무진하다. 사건과 물질의 의지를 외부의 공간, 혹은 절대적인 존재에게로 투사하는 세계관 자체는 조낸 진부한 테마임에 틀림없지만, 감독은 ‘거대 행성’ 이라는, 시대적 담론에 잘 맞지 않는 소재를 이용함으로써 상대적인 새로움을 선사함과 동시에 테마의 단순성을 적절히 마스킹 시키고 있는 듯 하다. 자 지금까지 말이 길었다. 그러나 이 영화 속 내러티브에서 멜랑콜리의 기원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 이 테마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다루도록 하자.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 멜랑콜리아 라는 행성 그 자체만을 두고 분석해 보도록 하자.
(지금부터 행성 멜랑콜리아를 지칭할 때는 굵은 글씨로 표현하겠다)
이어서 계속......
'[Verleugnung]의 글 > 별 걸 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과학] 복잡계 – 무질서한 초글링을 관조하면서 (0) | 2013.07.11 |
---|---|
[별 걸 다 리뷰] 영화리뷰 – 그랜토리노 (2009.08.16) (0) | 2013.07.02 |
[별 걸 다 리뷰] 영화리뷰 - 멜랑콜리아 3 (0) | 2013.06.28 |
[별 걸 다 리뷰] 영화리뷰 - 멜랑콜리아 2 (0) | 2013.06.28 |
[별 걸 다 리뷰] - 버거킹 와일드 웨스트 와퍼 (2011.04.17) (0) | 2013.06.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