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9.08.16 에 쓰여진 글임을 밝혀둡니다.)
수환이가 예전에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추천하길래 한번 봐야지 하고 다운받아놨다가 오늘에야 보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보자면, 일단 네이버 평점은 9.17을 기록하고 있고, 대부분의 리뷰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노익장을 과시했다는 둥 삶에 대한 노련한 안목이 돋보인다는 둥 호평 일색이다.
이 작품이 그토록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를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1. 그의 작품에 담긴 인종을 넘어선 사랑.
2. 코왈스키의 희생정신
3. 미국 내 타인종의 '수용성'에 대한 긍정적 제안
아마 이 작품을 보게 된 대다수의 사람이 위의 의견에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식으로 1,2,3 이렇게 번호까지 메겨가며 분석을 해놓으면 좀 거부감이 생기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 세가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잠정적인범주화를 해보았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평화로움 혹은 화목함 등의 감정을 느끼는 듯 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작품을 보고 나서 한동안 찜찜한 기분을 버릴 수 가 없었으며, 이 영화가 갈등의 해결을 통한 쾌를 가져다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갈등을 야기함으로써 사람을 고민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 가 없었다.
이 작품을 일종의 현실 재현적인 사실주의적 작품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또는 작품의 표현론적 기교 같은 것에 대해 비평을 하겠다면 나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여기다가 위와 같은 일종의 도덕적 잣대 같은 것을 들이대면서 여기서 어떤 윤리적 교훈 같은 것을 끄집어 내려는 행위는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 영화는 행복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씁쓸한 구린내를 남기는 영화다.
코왈스키는 지독히도 보수적인 미국인 노인네다. 모든 가족들이 그를 불쾌해하고 곁에 두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들과 친해질 수 가 없다. 반면 코왈스키는 곤경에 처한 수를 도와주려다가 정말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정말 이 코왈스키가 극 초반의 그 코왈스키가 맞는지 싶을 정도로) 그녀와 친해지며 서로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까지 이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은 미국인 친족 내에서의 그의 '소외됨'이 전제가 되어 있다는 거다. 그 소외됨이 그에 의한 것이든, 그에 대한 것이든. (소위 학교에서 잘 나가던 아이가 이지매를 당하게 된 후 소외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전형적인 드라마 구조를 생각해 보라.)
여기서 그 '그에 의한 소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코왈스키의 눈에는 치렁치렁 귀걸이를 하고 짙은 눈화장을 하는 그의 손녀딸, 그리고 풋볼 티켓이 필요할 때나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는 그의 아들이 지독히도 못마땅할 뿐이다. 그의 눈에는 아들이 일본 자동차를 타고 또 그것의 판매를 맡고 있는 사실 조차도 못마땅할 따름이다. 그만큼 코왈스키는 현재보단 과거에 잔존하는 인물이며, 그것은 또 '그랜토리노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가족과는 반대로, 타오나 수로 대변되는 '착실한 동양인 가족'은 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보다 '덜 변화된 가치'를 수호하고 있는 입장으로 관찰되며, 그렇기 때문에 극 안에서 '너무 앞서나가는 친족'으로부터 소외된 코왈스키가 '아직은 덜 앞서나간' 이웃 흐몽족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흐몽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실 '인종을 초월한 인간관계에 대한 지향' 따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를 움직인 원동력을 잘 살펴야 한다. 극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해석'은,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서의 '새로운 관계 맺음'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만약 그의 자식 손자들이, 그가 수호하는 미국적 가치들을 따르는 착실한 친족들이었다면, 그가 옆집 흐몽족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나 있었을까?
만약 나의 해석이 지나치게 지엽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한다 치더라도, 내 눈에는 코왈스키가 그의 옆집 흐몽족과 친해지게 되는 계기가 너무나도 불확실히다. 그냥 그는 어느 날 수가 우리집 와서 저녁먹으라는 소리에 '갑자기' 호감을 가진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는 거다. 코왈스키와 흐몽족의 접촉은 내발적이라기보다는 외발적이고, 개연적이라기보단 우연적이다. 이 사건은 그저 코왈스키라는 개인이 겪은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보편성은 끼어들 구석이 없다. 이 영화에서 이 부분은 영화가 끝나고도 상당히 찝찝하게 남는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코왈스키가 흐몽족과 친해지게 된 계기 같은건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거기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원동력 같은게 내재되어있다고 치고, 일단은 '친해졌다'라는걸 전제하고 출발해보자. 그 후 코왈스키는 수줍은 아이 타오에 대해 일종의 '멘토'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고 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코왈스키와 타오 간의 관계를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가 않다. 어딘가 불편하다.
타오는 항상 코왈스키에게 있어 '수련자'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타오는 그저 공구사용법을 배울 뿐이고, 남자답게 말하는 법을 배울 뿐이다. 그는 미국화 되는 법을 배운다. 반면 코왈스키가 흐몽족에게 일종의 '배움의 자세'를 갖는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흐몽족이 이웃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코왈스키도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배워 옆집 타오와 수의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냐 라고 물을 수 도 있겠지만, 이건 내가 아까 제기했던 문제를 또 다시 지나가고 만다. 코왈스키는 그저 그가 이 가족이 자기 취향에 맞아 '받아들였을 뿐' 이지, 이웃사랑을 위해 닫혀있던 마음을 열었다고 보긴 힘들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있다. 다만 그 문이 타오와 수 까지만 포함하고 닫혀있을 뿐이다.
나는 여기서 이것이 무슨 '인종 차별'적인 측면이 담겨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문제다. 코왈스키의 태도에는 문화에 대한 일종의 차등적 서열화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화는 하나의 '합일된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극 중 흐몽족인 수 조차도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타오가 당신을 따르고 싶어해요. 우리 아버지도 당신같으면 좋으련만. 우리 아버지는 너무 전통적이고 구세대적이에요."
"나도 구세대인데 뭘."
"그래도 당신은 미국인이잖아요."
코왈스키의 희생정신 이라는 측면으로 넘어가보자. 코왈스키의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타오는 그의 약간은 여성적인 성격 때문에 (이 여성적이라는 것도 다분히 미국인의 눈에서 보았을 때 그렇단 말이다.) 항상 주변의 동양인 양아치들에게 그야말로 '봉'처럼 휘둘린다. 동양인 양아치들은 그런 만만한 타오를 자신들의 쫄다구로 삼아 마음대로 부려먹고 싶어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사건건 타오에게 시비를 건다.
이에 코왈스키는 타오로 하여금 '힘'으로 대응하도록 가르친다. 힘에 의한 방어. 이 얼마나 미국적인가. 그러나 이런 식의 대응은 같은 흐몽족 내부의 편가르기를 더 재촉할 뿐이다. 실제로 코왈스키는 그 스스로가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여 힘의 논리로 정의를 되찾으려다 타오 가족이 더 큰 앙갚음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오의 '생물학적 동족'에 대한 증오심은 더 커지게 된다. "지금 당장 그놈들을 족치러 가요!". 이런 식으로 미국이 개입에 의해 힘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은 역사에도 수두룩 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필시 그 대상이 되는 민족의 내적인 불화를 야기하는 결과를 초래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최근 아프리카 대륙 내부의 숱한 내전들이라든지, 가깝게는 남과 북이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코왈스키는 이 일련의 '전쟁'에 자신의 몸을 내던짐으로써 마침표를 찍는다. 만약 코왈스키의 이런 행동을 통해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것이 일종의 '결자해지의 촉구'에 대한 메타포로서 기능한 것이라면 극의 결말에 대한 그의 스토리 텔링 방식은 어느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은 그동안 여기저기 '편가르기'를 벌여놓은 미국으의 행위에 대해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미국에 있으며, 그것을 해결해야 할 주체 또한 미국이다'라는 선언을 내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상당히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이런 해결 방안도 어딘가 찝찝한 것이 남아있기는 마찬가지다.
흐몽족 내의 '편가르기'는 과연 제대로 해결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타오는 같은 동족인 동양인 양아치들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는가? 아니 어쩌면 코왈스키의 죽음으로 인해 그것이 더 촉발되었다고 볼 수 는 있지 않은가? 극의 후반부에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흘겨보는 타오와 동양인 양아치들간의 시선싸움은 영화를 보는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동양인 양아치들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만은 타오와 그의 가족들이 평화를 찾았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는 순간은 어떻게 되는건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갈 것인가? 그들은 필시 감옥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또 다른 측면으로 바라 보았을 때, 그 동양인 양아치들이 감옥에 갔다고 해서 모든 위협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가? 타오를 괴롭힐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다른 곳에도 있지 않았을까? 타오는 또다시 다른 세력에게 괴롭힘을 당하진 않을 것인가?
이 문제는 자연스레 세 번째 의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혹자들이 여기저기서 거론하는 것처럼 이 작품이 진정 미국 내 타인종의 '수용성'에 대해 긍정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인터넷에 어떤이가 리뷰한 것을 여기에 인용해 본다.
"코왈스키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타오에게 자신의 그랜 토리노를 넘겨 주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그 성공의 희망을 주류 백인들만의 울타리에 가두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타오로 대변될 수 있는 다른 인종의 미국인들과도 나누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것이 저무는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주는 선물이자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코왈스키가 흐몽족과 관계를 맺는 메커니즘에 있다. 글의 초두에서 말했다시피 코왈스키와 흐몽족의 호의적 관계는 코왈스키의 아들과 손자손녀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하고 있다. 코왈스키는 자기 가족들에게는 미움을 받는 동시에 흐몽족에게는 환영을 받는다. 여기서도 편가르기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코왈스키는 가족들과 흐몽족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 는 없었던 것일까. 이런 어긋난 출발선 때문에 극의 결말에 코왈스키의 유언에 따라 그랜 토리노가 타오에게 돌아가는 장면에서 코왈스키의 가족들과 타오 간에는 보이지 않는 적대적 긴장감이 흐른다. 코왈스키와 흐몽족은 화합했으나, 결국 코왈스키를 제외한 미국인 즉 그의 가족은 타오와 화합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립하게 된다. 즉, 타오는 동양인을 대변했지만 코왈스키는 미국인을 대변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이 극단적인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코왈스키가 떠나가고 난 후 타오에 대한 코왈스키 가족의 인식은 오히려 더 부정적이 되지 않았을까? 예전에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테니.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수여받음으로써 말마따나 '주류 사회에 입성' 하는 방식은 평화적이라기 보다는 갈등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내가 이 영화를 지나치게 혹평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작품 자체가 좋지 못한 작품이라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 사람들이 세간에서 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맥락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식의 관점으로 이 영화에 권위를 부여할 수 있으려면, 코왈스키는 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해결책을 내놓았어야 한다. 이 작품은 충분히 감동적이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작품이 감동적인 이유는 '상대적'으로 마음이 닫혀있던 백인이 '상대적'으로 마음을 열어 동양인과 화합하게 되는 그 과정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를 접할 때 처럼 사람들은 어떤 '좋지 못한 관념을 가졌던 사람'이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관념'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들이 '우리 모두 스크루지 영감처럼 이런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따라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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