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자체를 위하여
그제 아내가 악몽을 꾸었단다. 꿈 속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고, 아내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차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려 했더니 차가 없어졌는데, 차와 함께 아기도 없어졌다고. 이후 꿈 속의 아내는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간 광인이 되었다고 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아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우린 정말 미쳐버리겠지?"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내는 그런 말은 입 밖으로도 꺼내지 말란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다가 순간, 아기가 죽는 것보다 오히려 아기가 실종되는 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실종되고 나면 그 부모는 평생 희망을 놓지 못하고 아이를 찾아 헤맨다고 들었다. 전에도 들었던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게 무얼지 감히 조금씩은 알게 되는 것 같다.
둘 다 아이가 없어지는 경험인데, 왜 한쪽이 더 고통스러운 결과를 갖다주는 걸까. 어쩌면 애도의 문제는 아닌가. 종종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그것을 위한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로 동일시되는 것 같다. 어떤 시간의 불충분성,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상태의 불충분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애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상실을 의미한다. 고전적인 이론에 따르면 그 대상은 시간을 들이고 천천히 마음 속으로부터 상실되어야만 한다. 너무 갑작스럽거나, 설사 갑작스럽지 않아도 그걸 마음이 용납할 수 없을 때는 멜랑콜리아가 생긴다. 상실된 대상에 대한 공격성이 방향을 잃고 헤매다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굳이 멜랑콜리아까지 가지 않아도, 애도는 일시적인 정신의 일탈을 야기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애도에 뒤따르는 환각이나 정신병적 증상은 정상적인 반응으로 간주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멜라니 클라인식으로 애도를 이야기해볼 수도 있다. 그녀는 어떤 면에서 우리가 상실을 받아들여야 우리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듯 하다. 멜라니 클라인이 말하는 건강한 상태는 depressive position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로서 그것에 대해 죄책감과 감사를 느껴야만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아이가 실종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의 불충분성, 수용가능한 마음상태 같은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애도를, 대상의 상실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것은 끝없이 연기된 상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는 대상이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붙들고 평생을 시달린다.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를 대상을 향해 애착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 게 바로 지옥은 아닐까.
지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얼마 전 한 페친분께서 <지옥> 이야기를 하시면서 죽을 날이 정해진 삶이 얼마나 비참할지 상상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동의가 많이 됐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죽을 날이 대충 언제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시점에 (그게 자신이든 타인이든) 상실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모든 인간적 관계로부터 우리가 손을 떼고 털고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일종의 위안을 얻기도 하지 않는가. (이것은 한편으로 아기가 엄마와의 이자적 관계를 강렬히 열망하면서도, 그 이자적 관계를 벗어나게 해줄 외부 강제적 힘, 즉 아빠라는 상징적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우리는 상실을 두려워하면서도 상실을 열망한다.)
이런 측면에서 <지옥>을 지옥이게 만드는 점이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나는 이 작품에 이중적인 지옥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우리는 대상(가족, 친구, 혹은 나라는 대상)이 상실될 수밖에 없다는, 그것도 특정한 시점에 필연적으로 상실될 수밖에 없다는 지옥의 상황에 직면한다. 말하자면 등장인물들의 애도는 적절하지 않은 시간 속에 맞물려 있다.
이 시간의 어긋남은 너무 이르게, 혹은 너무 늦게 짜여져 있다. 며칠 뒤 혹은 몇달 뒤 고지를 받은 인물들의 애도가 너무 성급하다면, 몇년 뒤 고지를 받은 인물들의 그것은 지나치게 멀리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느끼는 고통의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나는 후자의 케이스, 가령 정진수(유아인)의 그것이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더 비참하고 지옥같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박정자의 그것이 충격이나 급작스러움 같은 것이라면 정진수의 그것은 끈질기고 지긋지긋하다. 정진수는 빨리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는 더 이상 상실을 연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상실이 더 연기되면서 아예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등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래서 우리가 서로 장례를 치뤄줄 수도 없는, 이제는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말하자면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는, 죽음이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상실이 강제적으로 영원히 지연될 수밖에 없는, 애도라는 게 불가능한 세상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냔 말이다.
죽은 이가 자꾸만 돌아온다는 전형적인 클리셰가 공포물에서 자꾸 차용되는 이유 중에는 이런 것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면에서 <지옥>의 마지막을 구성하는 귀환의 장면이, 지옥의 두 번째 의미를 보여주는 그 장면이 그 어떤 장면보다도 끔찍하면서도 지옥같다고 느껴진다.
(덧붙여 : 여담으로 말하자면 사실 나는 <지옥>의 공포가 죽음의 도래라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죽음이 도래하는 뜬금없는 맥락이, '내가 왜 죽어야 해?'라는 그 충격이 공포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은 정진수의 죽음을 더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가 '의미'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내러티브를 끌어들인다. 정진수는 그냥 단순히 10년이나 죽음을 기다려야 해서 비참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죽음의 유보와 비참함의 상관관계만 따져보려는 목적에서 이 맥락은 무시했다는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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