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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철학] 신창원 체포 14주년 특집 세미나 – 신창원, 한 범죄자의 초상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3. 7. 17.

 

 

 

1999년 7월 16일 체포 당시 신창원의 모습

 

지난 시간까지는 푸코의 [나, 피에르 리비에르]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피에르 리비에르는 프랑스인으로서, 1835년 20세의 나이로 가족을 상대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당시 리비에르는 자신의 살인 동기와 과정에 대해 상세한 수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해졌는데요, 도대체 이 자의 살인을 광인의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성이 있는 자의 그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사법계와 의료계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아직까지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고 있죠.

그런데 리비에르의 사건과 그 사건을 둘러싼 당시의 다양한 담론들을 살펴보면서, 왜인지 몰라도 우리는 90년대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신창원'이라는 한 탈주범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신창원과 리비에르 사이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추출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비에르와의 유사성을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수기'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 내에서 범죄자가 자신의 수기를 남기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창원은 이례적으로 방대한 양의 수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두 번째는 '미규정성'입니다. 앞서도 말했습니다만 리비에르의 경우 그의 사고과정과 행위가 대단히 특유하여 그것을 정상으로 볼 것인가 광기로 볼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리비에르라는 '새로운' 존재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그가 그 어떠한 규정성으로부터도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창원의 경우도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그가 행한 여러 가지 행적들과 그의 생각들, 그리고 그의 배경 등이 어딘가 일치되거나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의 행적에 대해 많은 해석이 난무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특징인 '해석의 문제'가 드러나게 됩니다. 리비에르의 범행 당시 그의 행위를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해석적 틀이 동원되었습니다. 신창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가족들, 형사들, 동거녀들, 의료인, 그리고 언론 등이 그를 둘러싸면서 하나의 풍부한 담론체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일단 수기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창원은 탈옥한 뒤 도주극을 벌이는 와중에 많은 수기를 남기게 됩니다. 이것들은 그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 속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그가 거주하던 집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신창원의 수기는 리비에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주로 '해명'의 맥락을 띠게 됩니다. 이를테면 수기는 그가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동기를 설명한다든지, 그가 탈옥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수기가 그의 '본성'을 해명하기 위한 '통로', 또는 '항변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는 겁니다. 원론적으로 '수기'는 그 어떤 공적인 자료로도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비공식적인 문헌'의 계열 속에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비공식적 언표들이 오히려 그를 둘러싼 담론의 방향을 바꾸고 흐름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리비에르의 경우도 그렇지만, 수기는 그들 자신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기능하게 되고, 그것이 유일한 만큼 굉장한 힘을 내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수기의 '힘'을 작성자가 알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새롭게 대두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조작설'을 등장시키게 됩니다.

"훗날 수사진에 잡힐 것에 대비한 교묘한 포석입니다. 경찰에 잡힐 경우 국민들로부터 동정을 받기 위해 …… 한 것이지요." 평택경찰서 이정호 수사과장(경감)의 지적이다. ([탈옥수 신창원]; 이정훈; 새로운사람들; 232쪽)

박남진 원장(익산신경정신과)은 정신과 전문의답게 신창원의 행각을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영웅심리'의 표현으로 분석했다. 박원장은 "신창원의 일기장에 나타난 '전쟁선포'와 같은 말은 자신이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응징함으로써 자신을 '영웅'으로 포장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는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국민들에게 동정을 받으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과대망상은 영웅심리로 발전하고 그 영웅심리는 스스로의 자구책 마련을 위한 방편으로 삼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현대불교 ; 불기 2543년 8월 4일 233호; http://www.buddhapia.co.kr/mem/hyundae/auto/newspaper/233/w-5.htm)

당시 형사들은 신창원의 수기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견되도록 놓아진 것'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일부러 그것을 집이나 자동차에 흘려두고 갔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수기가 근본적으로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의도 없이 '발견된 것'은 더 순수한 것이고, 의도에 의해 '놓여진 것'은 보다 목적성이 짙은, 덜 순수한 것이다 – 뭐 이런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미나 중 박정수 선생님은 그것이 의도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수기가 해명의 통로로서 유일한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이고, 그로서는 그러한 통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호, 그것은 최소한의 자신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이죠.

신창원의 수기와 행적(다방 종업원들과의 애정행각, '의적'의 이미지)에 대해 그것이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신창원으로부터 7-80년대의 전형적인 통속소설 주인공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건데요, 80년대 당시 아직 젖도 못 떼고 있었을 저와 다른 젊은(?) 분들은 공감하기 힘든 측면이었습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신창원의 이러한 행적이 풍기는 이미지가 우리 내부에 각인되는 방식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범죄자' 혹은 '수감자'라는 것에 대해 세미나원들은 제각각 다른 이미지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교도관 생활을 하셨다던 한 분은 수감자들에 대해 비교적 친숙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들을 갖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투옥(?) 경험이 있는 박정수 선생님의 눈에 비쳐진 수감자들의 모습은 단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반면 저 같은 경우 '수감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용문신이라든지, 얼굴에 난 칼자국, 혹은 덩치 큰 '깍두기'같은 것이었습니다.

범죄자의 여러가지 초상들 – 여러분의 그것은 어디에 가깝습니까?

따라서 신창원의 행적이 어째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는가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저와 다른 분들은 다른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를테면 박정수 선생님 같은 경우, 신창원이 보여주는 '80년대스러움'이 그를 일종의 아이콘처럼 만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을 내놓으셨습니다. '80년대스러움'이 뭔지 저도 명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략적으로 파악해 본 그것의 특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그는 농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생각에 과감한 탈출을 감행하게 되고, 도주 행각 중에 여러 명의 여인들을 알게 됩니다. 여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 그는 순애보이자 사랑의 화신입니다. 게다가 의적 같은 모습도 보입니다. 훔친 돈을 이용해 불우한 이웃에게 기부를 하기도 하고,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이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일종의 열광 현상을 초래하게 했다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신창원은 대단히 전형적인, 말하자면 '규정적'인 특징을 가집니다. 그에게서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우리가 통속 소설에서 보아온 것만 같은, 그런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죠.

반면 저 같은 경우, 제가 '수감자'라는 것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가 부정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신창원의 행적 속에서 일종의 '미끄러짐'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가 밟아야 마땅한 듯한 일종의 예상된 경로들로부터 계속해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이 그에 대한 해석을, 규정적 해석을 어렵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특징인 '미규정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한 범죄자가 탈옥을 합니다. 그가 무슨 죄목으로 감옥을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탈옥 당시 국민들은 신창원이 어떤 죄목으로 투옥되었는지 등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탈옥을 했다는 것은 그의 형량이 대단히 길었음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고, 그 형량의 길이는 다시 그의 죄질이 크다는 것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분명 그는 흉악한 범죄자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탈옥범의 행적이 뭔가 묘합니다. 그가 정말 흉악한 범죄자라면 감옥을 나오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무자비한 횡포를 저지르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조용히 은닉하는 경로를 밟기 마련인데, 오히려 반대로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일반 대중에게로 노출시키는 경향을 띠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훔친 돈을 불우이웃에게 기부하는 행위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그러한 행위의 배경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인가. 그가 자신의 연인들에게 보이는 순진무구하고 애정어린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저만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수감자'라는 단어 속에서 아내를 극진히 아껴주는 남편의 모습보다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쉽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그렇지만 신창원이 보여주는 남성상은 분명 후자보다는 전자의 그것에 더 가깝게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불일치감'은 우리의 내부에 규정적으로 내재해 있는 '수감자' 혹은 '범죄자'에 대한 이미지를, 아니면 더 나아가 그에 대비되는 '비범죄자'의 이미지를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수감되어야 할 대상과, 수감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사회인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존재했던 경계선이 흐려지면서, 그것이 신창원에 대한 담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신창원을 둘러싼 해석의 격자는 거칠게 말해 크게 두 가지의 경로로 분지되어 나갑니다. 범죄자에 대한 규정을 다시 '재확인'하는 해석과, 범죄자를 비범죄자로 재규정하는 해석이 그것입니다. (두 가지 경로 모두가 결론적으로 규정을 내린다는, 말하자면 재코드화 시킨다는 데 있어서 큰 차이가 없기는 합니다) 전자의 해석 격자는 신창원의 모든 발언과 행적의 기원을 '전략' 혹은 '잔꾀'에로 수렴시킵니다. 또한 그의 범행의 기원을 찾아 어린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신창원을 태생적인 범죄자로 규정해버립니다. (이런 측면은 리비에르에 대해 사법관들과 의료인들이 하나의 통일된 '범죄자 또는 광인의 초상'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창원이는 손이 닿는 담장은 모두 뛰어 넘었어"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신창원의 도둑질 수법은 매우 대담하고 끈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한 고향 사람의 말이다. "어느 집에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창원이는 밤이 깊어 사람이 잠들고 난 후에 도둑질을 하는 게 아니었거든. 대문을 잠그기 전인 초저녁에 그 집에 몰래 숨어들어가 마루 밑이나 다락에 숨어서 잠을 자다가 그 집 식구들이 문을 잠그고 잠이 들면 그제서야 일어나서 물건을 훔치는 거야. 다음날 물건이 없어진 것을 알고 도둑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조사해 봤자 그 집 식구들은 전혀 모를 수밖에. 창원이는 전혀 겁이 없었던 거지." ([탈옥수 신창원]; 이정훈; 새로운사람들)

신창원 사건이 언론에 집중적으로 보도될 무렵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강순희가 신창원의 아이를 가졌다며 '신창원이 아이를 원했다' 고 보도한 적이 있다 ........ 그러나 수사 관계자들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여자 마음을 꼬시기 위해 신창원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 '내 아이를 낳아달라' 고 하면 여자는 십중팔구 '이 남자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하고 깜빡 속아 넘어갈 수 밖에 없죠. 그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완벽하게 숨겨 줄 여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는 결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탈옥수 신창원]; 이정훈; 새로운사람들; 203쪽)

한편 범죄자를 비범죄자로, 다시 말해 '우리 같은 인간'으로 재규정하는 해석의 격자는 반대로 신창원의 인간적인 측면들, 말하자면 '바람직한 성품'이나 '착했던 어린시절'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가 범죄의 길에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환경 요인 등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본받을 점이 있어요. 첫째, 그도 쫓겨 다니는 힘든 처지일 텐데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정신력이 돋보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졌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은 곁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모른 척합니다. 돈은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고 했습니다. 신창원은 도둑질로 마련한 돈이지만,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내놓을 줄 아는 정신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집념이 대단해요. 1997년 12월 30일 신창원이 평택에서 도망친 후 한 형사가 찾아와서 '쇠톱을 ... 쇠창살을 잘라왔다' 고 했습니다. 또 화장실 창을 통과하기 위해 살을 빼려고 1년 동안이나 자기 밥을 다 먹지 않았다고도 했습니다. ...... 자기가 품은 생각을 추진하는 집념이 대단합니다. 그러니까 탈옥에 성공했겠지요." – 요한의 집 원장의 말 ([탈옥수 신창원]; 이정훈; 새로운사람들; 230쪽)

"가난하다 보니까 남의 논 세 마지기를 부쳐먹었어요. 그런 옹색한 살림을 꾸려가며 집사람 병수발을 10년쯤 하다 보니까 조금 일궜던 밭도 다 팔아버렸어요. 창원이까지 해서 아이들 다섯 명을 데리고 살려니까 앞이 막막하더라구요. …… "우리 창원이가 수박 한 덩이 훔치다 나에게 걸려서 경찰서로 갔다구요? 천만에요. 그때만 해도 수박서리, 참외서리는 물론이고 왠만한 건 눈감아주는 게 시골 인심이었어요. 한 번은 수박밭 주인이 와서 웃는 소리로 '이놈 자식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갔어'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창원이에게 욕을 해준 적이 있지요. 그리고 한 번은 동네 노인이 집으로 와서 '애가 차 대견하다' 고 칭찬을 하더라구요. 짐을 들고 가는데 창원이가 와서 얼른 들어주더래요." "이번에 도망칠 때에도 한 번 밤에 나를 몰래 찾아왔었어요. 잠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아버지'하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막 웁디다. 내가 붙잡아 자수를 시키려고 하니까 어느 샌가 없어져버렸어요. 그놈이 인정이 많아서 그래도 아버지한테는 잘해요." - 엄상익 변호사와 신창원의 아버지 신흥선씨의 인터뷰 내용 ([신창원 907일의 고백; 엄상익; 제이피유비)

신창원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머니 사망 후 어려움이 시작됐다. …… 계모와도 친해 보려고 했지만 동생을 구박하는 것을 보고 분노만 커졌다. …… 가장 큰 그의 문제점은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숨겼기에 성장 후 범죄행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 부모의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아이가 견디기 힘든 어려움을 겪고 성장한다면 제2의 신창원이 될 수 도 있다. 지금이라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며 무슨 일로 답답해 하는지 상냥하게 물어보면 어떨까. (경향신문; 1999년 7월 28일; 김병후 박사의 아줌마 클리닉)

덧붙여 신창원 신드롬을 보면서 '사회적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지 절감하게 됐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수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창원은 자신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박적으로 강조하는 한편, 기부라는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표명함으로써 자신이 사회 구성원의 일부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남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짓은 하지 않았다. …… 아무리 급한 상황이 오더라도 일반인은 절대 해치지 않겠다. …… 나는 그 아이들에게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는 만큼의 돈을 주었다. 그들에게 4, 5백은 큰 돈이었을 것이다. 난 많은 돈이 필요 없다. 혼자 있으면 3, 4백 2, 3개월 지낼 수 있는 돈만 있으면 충분하다. 내가 좋은 일을 하려고 돈을 줬거나 이용할려고 돈을 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나보다는 그들에게 더 돈이 필요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창원의 수기)

아이들이 가출을 하는 이유는 부모의 무관심과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아이를 집으로 돌려 보낸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도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이가 가정을 보금자리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가출 소년 소녀를 상품가치로 생각하고 그들을 이용해 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라져야 한다. 그들의 고통을 대가로 수백 수천억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진짜 힘들고 어려움에 처한 그들에게 쉼터는 만들어 주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짓밟지는 말자. 그들을 두 번 죽이지 말자. (신창원의 수기)

어릴 적 저는 신창원의 도주 행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신창원이라면, 배를 하나 훔쳐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외국이나 무인도로 떠나버릴텐데. 신창원은 배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아니면 먹을 것도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시도를 하지 못하는 건가 보다'. 말하자면, 제가 보기에 신창원이 그러한 대담한 탈출을 감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술적인 어려움이나 여건의 어려움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창원이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테죠. 신창원을 가장 공포스럽게 만든 것은 형사도, 사법부도 아닌, '사회'였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사회에서의 도태, 그리고 '범죄자'라는 굴레와 낙인. 그것을 벗어 던지기 위해 신창원은 자신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인간성'들을 먼지 하나 안 남기고 다 쏟아내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자는 생물학적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회적 죽음이라고도 했다지요. 사회라는 것, 상징의 세계라는 것이 우리의 존재에 얼마나 깊게 각인되어 있는지 새삼스레 절감하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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