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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동일시와 의태

by verleugnung 2020. 8. 15.

의태란 모방같은 것이다. 나방들은 나무의 결에 맞추어 자신의 색깔을 바꾼다. 개구리들은 이파리 색깔과 자신을 비슷하게 만들어버린다. 사실 다위니즘을 따르는 진화론은 이것을 '자연선택'으로 환원해 설명하곤 한다. 그렇게 자연에 적응한 개체들만 선택되다 보니 그런 '비슷하게 닮은' 개체들만 남지 않았냐는 것.

 

그런데 세계 속에는 꼭 그렇게만 설명할 수 없는 '닮아가는' 현상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애완동물을 키우면서 서로 닮아가고, 부부끼리는 서로 닮아간다. 친밀한 사람들끼리는 말투가 닮아가고 습관이 닮아간다.

 

내가 누군가의 말투와 행동을 닮는 과정을 설명할 때 정신분석학은 동일시 개념을 끌어온다. 우리는 누군가를 모델로 해서, 무의식적 과정 중에 그 모델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일시 개념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동일시가, 그 말처럼 '동일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이 인간 아닌 타 생물이나 혹은 더 나아가 사물 (나는 사물을 닮아갈 수도 있다고 믿고 있다) 을 닮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기에 난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둘째 측면은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다뤄보도록 하고 첫째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가령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A라는 동일성으로서의 어떤 모델을 포착하고 나서, 그 모델의 모습과 나의 모습을 비슷하게 바꾸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고정된 동일성을 확립하게 되면서 '대상'이라는 것은 두 가지 모습을 띠게 된다.

 

대상의 첫째 모습은 '내가 되고싶은 대상'으로서의 모습이다. 둘째 모습은 '내가 갖고 싶은 대상'으로서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보면서 '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느끼거나, '아 저 사람을 갖고 싶다'고 느끼게 된다.

 

동일시에는 똑같이 동일시가 있을 뿐이지 뭐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냐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환자들 사이에서 진짜로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동일시가 나타난다는 데 있다.

 

가령 병원에서 환자들을 보다 보면, 아직도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된다. 가령 어떤 경우 A라는 사람은 자신이 증오하던 시어머니가 사망한 뒤, 그 시어머니가 과거에 앓았던 형태의 질환을 동일하게 경험하는 증상을 보인다. 또 어떤 경우 B라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던 부모를 상실한 뒤, 그 부모가 가졌던 정신병리를 그대로 답습하려는 증상을 보인다.

 

프로이트는 여기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그는 문제가 꼬인다고 느낀다. (<집단 심리학과 자아분석> 참조) 프로이트에게서 문제가 이렇게 까다롭게 변한 이유는 그가 리비도를 '주체에서 대상으로 향하는 무엇'으로 간주한 상태에서 논의를 끌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리비도라는 '관계' 안에서 주체와 대상은 고정된 이항 요소로서 전제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체는 대상을 '따르고 싶은 대상'으로도, '갖고 싶은 대상'으로도 대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런 동일시의 문제를 의태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조금 더 쉽게 풀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동일시는 그저 단순히 '서로가 의태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리비도의 여부를 떠나서, A와 B는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닮아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시몽동은 이런 것을 다루기 위한 개념으로 '유사성(ressemblence)'에 대비되는 '유비(analogie)'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동일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동일시를 오이디푸스적인 프레임으로부터 '구조'해낸다면, 그래서 더 보편적인 영역으로 끌어낸다면, 인간과 인간 아닌 대상 사이의 '닮아감' 또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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