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능력으로서의 판단력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 삐그덕 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의 바람을 맞으며, 여기저기 구멍 뚫린 민소매를 입고 있는 한 장년 남성이 TV를 응시하고 있다. 장년 남성 조씨는 무직자다. 그에게는 TV가 유일한 친구다. 지금 TV에서는 만인의 연인 수지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지금 조씨가 수지라는 존재를 감상하고 있는 동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미적 판단의 과정들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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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나의 수지!!!" - by 장년 남성 조씨 |
수지를 바라보는 조씨의 내부에서 우리는 인간의 두가지 기본적인 심성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지각’과 ‘욕구’가 바로 것이다. 그는 그의 감각기관을 통해 수지라는 존재를 지각하고 있다. 또한, 그가 남성으로서의 능력을 정상적으로 가지고 있기만 하다면, 지각함과 동시에 그녀에 대해 특정 욕구를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마주할 때에는 이처럼 지각의 인식과정과 욕구의 실천과정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분석하기 위해 칸트는 철학을 다음 두 가지로 나누게 된다.
1. 이론철학 2. 실천철학 이론철학에서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다룬다. 여기서 소위 말하는 '이론이성' 혹은 '오성'이라는 것이 인식능력으로서 요구되게 된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론 철학은 '자연 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천철학에서는 인간의 '실천능력'을 다룬다. 여기서는 '실천이성' 혹은 '의지'라는 인간의 능력이 요구된다. 이 때 의지는 본성적으로 이런저런 대상 (이를테면 수지)을 지향하게 되지만, 그 의지는 대상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칸트에 따르면 의지는 보편화가능성이라는 순수 형식에 따라 규정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인간의 의지가 대상에 의한 규정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는 인간의 의지가 자율성을 지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실천철학은 '자유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이론철학의 영역을 '감성계'로 규정하고, 실천철학의 영역을 '초감성계'로 구성한다. 이 두 영역은 자연개념과 자유개념이라는 완전히 상이한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영역을 형성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두 영역이 독립적이긴 하지만, 자유개념은 자기의 법칙에 의해 부과된 목적을 감성계에서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이론철학과 실천이성 사이를 매개할 새로운 철학을 요청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철학의 원리는 어디서부터 확보될 수 있을까? 지성이나 이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지성개념에 의해서는 자연개념에 의한 입법이 수행되며, 이성개념에 의해서는 자유개념에 의한 입법이 수행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은 각각 독립적인 입법기관을 갖고 있는 셈이다. 두 부분을 매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판단력'이다. 칸트는 지성과 이성 사이에 판다력이라는 중간항이 있다고 하면서, "이 판단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록 그것이 하나의 고유한 입법을 표유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법칙을 탐구하기 위한 자기의 고유한 원리를 선험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의 고유한 원리란 ‘합목적성’을 말한다.) 2. 매개 능력으로서의 반성적 판단력과 그 원리 판단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 그것이다. 다시 수지를 바라보고 있는 장년남성 조씨의 예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여기서 설명의 편의를 위해 두 가지 평행 우주에서 공존하고 있는 ‘조씨 A’와 ‘조씨 B'의 존재를 가정해보도록 하자. ’조씨 A'는 서울 태생으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서울에 거주중이다. 서울 출생인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사람 유형과 문화를 접하고 살았다. 반면 ‘조씨 B’는 어릴 적 부모와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난을 당해 평생을 무인도에서 살다가 얼마 전 구출돼 도시로 이주해왔다. 이 두 사람이 TV 속 수지를 바라볼 때 일어나는 판단의 양상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조씨 A는 어릴 적부터 아리따운 여성들을 많이 보고 자라왔다. 그렇기 때문에 머릿속에 여성들에 대한 나름의 분류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코가 높은 여자는 미인이다’ 혹은 ‘입술이 두꺼운 여자는 매력적이다’ 하는 분류 또는 규칙들이 이미 내재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씨 A가 여성의 타입에 대한 일종의 ‘보편’들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씨 A가 수지를 바라보면서 ‘음. 저 여자는 살갗이 희고 눈매가 선하므로 청순한 스타일의 미인이구만 ’ 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수지라는 존재를 이미 존재하는 ‘보편’들 중의 하나로 포섭시킴으로써 규정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조씨 B는 삶의 대부분을 무인도에서 보냈기 때문에, 여성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고, 따라서 여성에 대한 어떤 ‘보편’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보자. 그는 수지라는 존재를 처음 마주하는 순간, 수지를 ‘보편‘의 일부가 아닌 ‘특수’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로부터 거꾸로 ‘보편’을 찾아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조씨B가 반성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단력 일반은 특수를 보편 아래 포함된 것으로서 사유하는 능력이다. 보편(규칙, 원리, 법칙)이 주어져 있는 경우 특수를 이 보편 아래 포섭하는 판단력은 ...... 규정적 판단력이다. 그러나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어서 판단력이 특수에 대해 보편을 찾아내어야 할 경우의 판단력은 반성적 판단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성적 판단력에 의해 현상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성이나 이성에서 유래하는 원리와는 다른, 즉 판단력 자체에서 유래하는 원리가 필요하다. 칸트는 이러한 원리를 합목적성의 원리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자. 칸트가 말하는 ‘목적’이란 무엇일까? 그에 따르면, 목적이란 “어떤 개념이 대상의 원인(그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적 근거)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그 개념의 대상”이다. 또한 합목적성이란 “어떤 개념이 그 객체에 관해서 갖는 인과성” 이다. 칸트가 이와 같이 반성적 판단력의 원리로 합목적성을 내세우는 것은 ‘자연’이라는 개념이 ‘자유’라는 목적을 실재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임을 주관적으로나마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3. 미의 분석론 : 취미판단의 네 계기 다시 조씨에게로 돌아와보자. TV속에서 살인미소를 흘리는 수지를 바라보며 조씨는 침을 흘리고 있다. 한쪽 소매로 침을 닦으며 조씨는 그녀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름답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걸까? 칸트는 이와 같은 미적 판단을 ‘취미판단Geschmacksurteil’이라 일컫는다. 취미판단은, 그것 또한 일종의 판단이기 때문에 범주에 따른 네 가지 계기로 구별이 된다. 1) 취미판단의 제1계기 : 성질 (무관심한 관심) 무관심한 관심이라니. 이건 또 뭔 형용모순인가. 칸트가 제기한 이 변태적인 모순어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관심’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관심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체적 욕구나 경향성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관심’이다. 이 때 감각적 관심을 충족시키며 만족을 주는 것을 ‘쾌적한angenehm'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선한 의지에 의해 발생하는 ‘도덕적 관심’이다. 도덕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것은 ‘선한(gut)’ 것이다. ‘무관심한 관심’이란 이 두 가지 종류의 관심에서부터 벗어나있는 관심을 뜻한다. 이제 우리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종류의 관심과, 무관심한 관심에 의해 세 가지 종류의 만족을 상정할 수 있다. ‘쾌적함, 선, 미’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을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쾌적함 선 미 욕구 감각적 욕구 도덕적 욕구 욕구와 무관 대상의 현존 관심에 따른 만족 관심에 따른 만족 무관심한 만족 감정 쾌락을 주는 것 존중되고 인정되는 것 단지 만족을 주는 것 기능주체 모든 이성적 존재자, 동물적 존재자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 동물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존재자, 즉 인간 마음 경향성 존경 호의 만족의 성격 감각적 욕구에 의해 제약된 만족 도덕적 개념에 의해 제약된 만족 자유로운 만족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무관심성이란 관심 자체를 부정하는 것, 다시 말해 대상과의 관계 자체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인 향락이나 목적(또는 의도)가 제거된, 대상과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만남을 의미한다고 봐야한다. 칸트는 이러한 태도를 관조Kontemplation라고 부르는데, 취미판단이란 바로 이와 같은 순수한 관조에 근거해 내리는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칸트는 만족의 세 종류 중 미에 관한 만족만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만족이라고 천명한다.
그렇다면 이번엔 조씨의 사례로 다시 돌아가 무관심의 만족에 근거한 미적 판단이라는 게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조씨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그 지역으로 봉사활동을 나온 스타 수지를 보게 되었다. 촬영팀 사이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가 참으로 아름답고 이쁘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때 그가 느낀 이 ‘아름답다’는 판단은 과연 관심에 의한 것일까? 무관심에 의한 것일까? 그의 존슨이 갑자기 부풀어 오른다든지 그가 머릿속에 상상하는 그림들의 대부분이 살색으로만 이루어져있다면, 그것은 관심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종류의 만족은 수지라는 대상의 현존과 결부된 만족으로서 그는 이 과정에서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고 여기서 일종의 쾌적함을 느끼게 된다.
조씨가 자신의 존슨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하는 그 순간 수지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해보자. 굶어죽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조씨는 그녀에게서 성모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최고선으로서의 수지! 테레사 수지! 이 때 조씨는 다시 한번 다른 차원에서 수지가 참으로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관심한 관심이라고 볼 수 있을까? 조씨는 자신의 도덕적 욕구가 그녀를 바라봄으로 인해 충족되는 것을 느끼게 되고 수지라는 대상을 일종의 존중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된다. 칸트는 이런 종류의 만족 또한 관심에 의한 것으로 본다.
어떻게 해도 존슨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조씨는 즉시 화장실로 달려가 못된 존슨을 잠재운다. 존슨과의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돌아온 조씨.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수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이제서야 그는 아무런 의도도 가지지 않은 채 수지라는 대상을 그것의 형식 자체로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수지는 신체적 만족의 대상도 아니며, 도덕적 만족의 대상도 아니다. 수지는 수지 자체로서 조씨에게 만족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조씨는 그렇게 수지를 관조하게 된다. 취미판단이 시작되는 것이다.
“취미판단은 오로지 관조적이다”
2) 취미판단의 제2계기 : 양 (주관적ㆍ감성적 보편성)
그런데 대체 이 취미판단이라는 것은 주관적인걸까? 객관적인걸까? 칸트에 따르면 취미판단은 감성적 판단이다. 여기서 ‘감성적’이란 말 그대로 대상에 대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주관적’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를테면 내가 “나의 여자친구는 아이유를 닮았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의 친구가 “너의 여자친구는 신봉선을 더 닮았다!”라고 응수했다고 해보자. 물론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느낀 바대로 이야기한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두 사람의 판단이 ‘주관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내가 봤을 때는 분명 아이유를 닮은 그녀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신봉선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 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관적 판단’이 ‘보편성’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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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여자친구가 아이유를 닮았다면 필자로서도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여기서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만약 모든 미적 판단이 이런 식으로 주관적 판단에 기인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미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대상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모든 사람의 찬동을 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단 말인가?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는 세계 각지의 방문객들이 미묘한 웃음을 띠고 있는 모나리자의 저 미소를 보고 감탄에 마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생기는 갈등의 논점은 이렇다. 우리는 누구나 ‘보편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적 판단이 주관적인 한, 그것이 보편성을 동반한다는 것은 모순이 되어버린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일이 이렇게 가다 보면 어딘가 상황이 칸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칸트가 누군가. 근대철학의 토대를 닦았던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던가. 칸트적 대답은 이렇다. 여기에서의 ‘주관적’이라는 말은 ‘사적’이라거나 ‘개인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감성적 판단에 있어서 주관성은 객관에 주거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객관에 대한 부정으로서 기능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한 감성적 판단에 있어서의 보편성이란 ‘주관적 보편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객관적 보편성’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감성적 판단은 “일체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식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객관적으로 성립하는 보편성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에 대해 타당하다는 주장이 성립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보편적일 수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해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미적 판단이 무관심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어떤 사람이 일체의 관심과 무관하게 자신이 어떤 대상에 대해 만족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는 그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만족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판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 어떤 욕구와 의도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무관심 적으로 대상을 대하게 된다면, 그것이 개인적 욕구와 의도를 동반하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보편성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은 객체 전체에 대한 보편성 이라기보다는 판단자 전체에 대한 보편성이라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설명하기에 앞서 보편성을 두 가지로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취미판단에서의 보편성은 ‘논리적 보편성’과 구별된다는 뜻에서 ‘감성적 보편성’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보편성이 바로 논리적 보편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보편성은 ‘분량’ 범주 중 전체성의 범주에 해당하며, 따라서 전칭판단의 형태를 띠게 된다. (전칭판단 : “모든 x 는 y 이다”) 반면 순수 감성적 판단, 혹은 취미판단의 경우 “논리적 양에서 본다면 모든 취미판단은 단칭판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제기될 수 있다.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와 같은 전칭판단은 어째서 취미판단이 될 수 없는가? 칸트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판단은 개별적인 장미들에 대한 감성적 판단들이 모여 그들 간의 비교를 통해 획득되는 판단이다. 그런 한에서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감성적 판단에 근거를 둔 논리적 판단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럼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판단자 전체에 대한 보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은 모든 판단자가, 일체의 관심을 떠난 무관심한 상태에서 판단을 내린다면,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또는 내려야만 한다는) 의미에서의 보편성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감성적 판단의 보편성을 “‘아름답다’라는 술어를 논리적 범위 전체에서 고찰된 객관의 개념과 결부시키지는 않지만, 이 술어를 판단자들의 범위 전체로 확장”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3) 취미판단의 제3계기 : 관계 (목적 없는 합목적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기술하기에 앞서 목적 있는 합목적성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자. 장년 남성 조씨가 수지를 바라보면서 ‘아...그녀와 사귀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조씨에게 있어 수지의 존재는 지극히 합목적적일 것이다. 단 ‘이성을 사귀기 위한’ 목적에 입각했다는 한에서. 그렇다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란 무엇인가?
설명에 앞서 취미판단의 특징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취미판단은 규정적 판단과는 다르다. 즉 취미판단은 주어진 규칙도 개념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주어진 표상은 그것을 포착하는 인식능력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활동하게 하여 특정한 미적 감성 상태를 유발하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취미판단이 감성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판단을 규정하는 근거가 개념이 아니라 심의력의 유동에 있어서의 조화의 감정이며, 이 조화는 감각될 수 있을 뿐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심의력’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상상력’과 ‘오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대상을 직관함에 있어 상상력의 작용은 ‘시간 공간적 연장 속에서 다양을 포착하는 활동’이라면, 오성의 작용은 ‘그러한 다양을 하나로 통일화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취미판단에서의 상상력과 오성은 우리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볼 수 있는 그것과 어떤 차이점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론인식의 상황에 있어서 상상력은 오성을 위해 일하는 반면 취미판단에 있어서 상상력과 오성은 상호 대립하면서 통일하는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 때 감성적 주체는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상호 침투 작용을 ‘합목적적이다’라고 느끼게 되고, 쾌감이 유발되어 그 상태에 몰입하는 관조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감성적 합목적성)’의 주관적 측면을 구성하게 된다.
“취미판단에 있어 표상방식이 가지는 주관적인 보편적 전달 가능성은 일정한 개념을 전제함이 없이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상상력과 오성과의(인식 일반의 성립에 필요한 대로 이 양자가 상호 합치하는 한) 자유로운 유동에서 나타나는 심적 상황 이외의 것일 수가 없다”
이제 ‘목적 없는 합목적성(감성적 합목적성)’의 객관적 측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객관적인 측면에서, 감성적 합목적성은 대상들의 표상에서 발견되는 ‘부분들과 전체의 조화’를 말한다. 칸트는 이를 ‘형식적 합목적성’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형식적 합목적성이라는 규정을 통해 칸트는 순수 감성적 판단은 대상의 표상에 있어서 “대상의 성질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관계하는 표상 능력들이 대상을 규정할 때의 합목적적 형식만을 알려줄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상의 내용을 채워주는 대상의 성질, 즉 질료를 배제한다. 오직 형식만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형식들을 포착하는 상상력의 유동적 활동성이 그런 형식들을 통일적으로 의식하는 오성의 유동적 활동성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생동적 쾌감이 발생하게 된다.
조씨의 예로 돌아가보자. 조씨가 수지라는 존재에게 있어 그 내용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형식의 차원에서 수지를 관조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조씨의 상상력은 그녀의 오똑한 코, 앵두같은 입술, 선한 눈매, 흰 살갗과 그것들의 배치를 인식하게 될 것이며, 오성의 활동을 통해 그 형식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때 상상력과 오성에 있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서로 자연스럽게 조화를 유지할 때, 조씨는 그 자유로운 유희 안에서 유동적이며 활동적인 생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감성적 합목적성에 대한 주관적 및 객관적 측면의 규정은 자연스럽게 감성적 경험에 있어서 주,객의 관계를 합목적적으로 표상하게 만든다. 인식 능력들의 일치와 조화 또는 생명감의 고양이라는 주관적 측면은 대상의 형식적 합목적성이라는 객관적 측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성적 합목적성은 감성적 주체와 그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목적 없는 자유로운 일치로 규정된다. 이는 객체에 투사된 주체의 자기 경험임과 동시에 주체에 투사된 객체의 (또 다른 방식의) 드러남이다. 말하자면 인식 능력들 간의 자유로운 일치가 주관과 객관의 자유로운 조응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4) 취미판단의 제4계기 : 양상 (범례적 필연성)
네 번째 계기에서 칸트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취미판단이 제기하는 필연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공통감’의 문제다. 필연성의 문제란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조화와 만족 간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 필연성의 계기가 보편성의 계기와 다를 바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계기는 상이하다고 볼 수 있다. 보편성의 계기란 판단이 포함하는 분량, 즉 모든 판단자에 대해 동일함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필연성이란 감성적 판단과 만족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주관적 보편성에 대해 논의했던 칸트가 다시 필연성의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양상범주’와 관련된 취미판단의 특징을 짚어보고, 아울러 보편타당성의 근거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선명하게 조명되지 않은 ‘필연성의 고유한 성격’을 분명히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취미판단의 필연성이 “이론적인 객관적 필연성” 및 “실천적인 필연성”과는 다른 “특수한 종류”임을 강조한다. 미적 판단에 결합된 필연성이 인식판단이나 도덕적 판단의 객관적ㆍ대상적 필연성과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인식판단이나 도덕적 판단의 경우 ‘무제한적이며 자명한’ 필연성을 갖는데 반해, 미적 판단의 경우 ‘제한된 주관적 필연성’을 갖는다. 각각의 판단이 전제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성격 또한 매우 상이하다고 볼 수 있다. 인식판단의 경우 ‘모든 사람’은 공통적인 지각기관을 통해 같은 지각경험을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타인 전체를 의미한다. 반면 취미판단에서의 ‘모든 사람’은 대상을 정서적으로 느끼고 가치 평가하는 사람을, 다시 말해 구체적인 문화적ㆍ역사적 경험지평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공통감’의 문제를 다뤄보도록 하자. 그 전에 감성적 판단의 특징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감성적 판단의 필연성이란 대상을 마주함으로써 얻게 된 감정 상태와 그를 통한 만족 사이의 필연성이다. 즉, 그것을 마주하는 경험의 측면이 요구되기 때문에 이러한 필연성은 단지 일회적인 사례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감성적 판단의 필연성을 ‘범례적 필연성’이라고 부르며, 이 때에 그 범례가 되는 사례는 보편적이면서도 개념적으로는 무규정적인 규칙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범례적 필연성은 “공통감의 전제하에서는 객관적인 필연성으로 표상”되는 특징을 가진다. 그렇다면 공통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칸트에 따르면 공통감이란 “무엇이 만족을 주는지 또는 무엇이 불만족을 주는지를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감정에 의해서 규정하는, 그러면서도 보편타당하게 규정하는 주관적 원리”이며, “오직 공통감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만 ...... 취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즉 미적 판단주관은 이러한 공통감을 “우리 인식의 보편적 전달 가능성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전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로, 칸트는 ‘공통감의 이념’이 경험적ㆍ심리적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둘째로, ‘공통감의 이념’ 또한 이성이념이나 실천이성과 같이 경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 초월논리적 차원의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공통감의 이념’은 미적 대상의 가능성을 위한 초월논리적 원리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취미판단에 있어 공통감의 역할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칸트는 ‘공통감의 이념’이 일종의 문화적 규범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즉, 공통감의 규제적 원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규제적 원리를 분석하기에 앞서 일단 인간 지성의 준칙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보통의 인간 지성의 준칙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즉 장년 남성 조씨, 또는 우리가 보통의 정상 인간이라면 아래의 세 가지 준칙을 모두 갖고 있어야만 한다.)
1. 스스로 사유할 것 (지성의 준칙)
2. 다른 모든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사유할 것 (판단력의 준칙)
3. 언제나 자기 자신과 일치하도록 사유할 것 (이성의 준칙)
위에서 언급한 지성의 준칙 중 ‘판단력의 준칙’이 곧 규제적 원리로서의 공통감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공통감이란 ‘자신의 판단을 전 인간 이성에 견주어 판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공통감이 규제적 원리인 것은 경험의 구성이 이 이념에 비추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공통감은 내적ㆍ감성적 경험의 구성을 통제하는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판단력의 준칙’은 다시 ‘지적 판단력의 준칙(논리적 공통감)’과 ‘감성적 판단력의 준칙(감성적 공통감)’으로 구분된다. 논리적 공통감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사유하되, 건전한 인간 지성(상식)에 입각하여 자신의 판단을 고려하는 것이다. 감성적 공통감이란 감정의 차원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신의 판단을 반성(일종의 공감Sympathy)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적극적인 해석을 가할 경우 우리는 공통감이 주관의 능동적인 ‘반성작용’의 인간학적ㆍ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미적 대상을 마주한 주관이 ‘공통감의 이념’에 의한 구속력을 감지하고, 또 그것에 의해 규정(추동)됨으로써 상호 주관적 지평을 초월적으로 선취하는 반성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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