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인터넷 매체에 글 싣기를 중단했다.
처음에 시작하게 된 건, 아무래도 글의 인지도를 높이고 싶어서가 아니었나 싶다. 대중들에게 글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욕망. 누구나 그런 게 있지 않겠나.
몇 차례 기고를 해봤는데 연달아 채택이 됐었고, 해당 매체에서 정기적으로 글을 실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흔쾌히 수락을 했다. 주로 정신의학적 개념을 설명하거나 그것을 이용해 사회현상을 분석해보는 글을 썼다.
장점도 많았다. 항상 글이 어렵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편집자의 도움을 받다보니 훨씬 '대중적'인 글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이 '얼마나 잘 읽히냐'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기준은 언제나 읽어주는 사람에게 두어야 한다. 혼자 고집을 부려봤자 글은 고인물에서 썩게 될 뿐이다. 내가 편집자의 의견을 계속해서 수용해온 데에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 과정이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글에 대해 지적을 당하는 것만큼 자존심에 상처가 되는 것도 없다. 어떤 경우에는 그 타격이 이틀 내내 가기도 했다. 그래도 참았다. 일종의 연습이고 수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불편함이 나의 심리적 이득을 훨씬 상회하기 시작했다. 글이 대중들에게 읽힐 때의 즐거움은 별로 없고, 지적을 당할 때의 스트레스가 훨씬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내가 쓴 글을 나 스스로 별로 읽고 싶어지지 않았다.
과거에는 항상 내가 쓸 때 재미있는 글을 써왔던 것 같다. 무언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것을 정리(더 정확히는 '종합')하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이다. 내가 아는 내용을 쓰기보다는 항상 내가 탐구하고 싶은 것을 썼고, 그러다보니 글의 목적은 지식 전달보다 지식의 재구성이나 '재표현'같은 것이 됐다.
편집자가 내게 요구한 건 '알고 있는 지식을 먹기 좋게 전달해달라'는 거였다. 그는 요즘 사람들이 지루한 글을 읽지 않는다면서 문단을 더 줄이고, 더 어려운 개념을 버리고, 더 보편적으로 설명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종종 잘 쓴 글이라면서 내게 예시를 보내주곤 했는데, 솔직히 내 관점에서는 그리 잘 썼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증권가 찌라시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학원에서 고객을 꼬시는 문구 같다고 해야 하나. 내 알량한 자존심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나보다.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나보다.
사실 이번 달에는 '아이의 훈육'과 관련해 글을 쓸 참이었다. 글의 기본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요즘 시대에 오은영 박사와 강형욱 훈련사가 폭풍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 이중의 반동을 거쳐 (물론 이렇게 어렵게 쓰지는 않았지만) 발생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뭐 그렇게 신선하고 독창적인 사고는 아니지만, 그냥 사람들이 그 원인을 알면 좀 더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 쓰려던 것이었다.
나는 정신의학과 철학으로 대두되는 현대 학문이 훈육의 부재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반동'으로 기술했다. 과거시대의 잔재인 훈육과 폭력에 대한 반동이 훈육에 대한 혐오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훈육의 부재로 연결되었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훈육의 부재가 오히려 두 번째 반동을 낳으면서, 훈육을 강조하는 교육자들에 대한 인기를 야기했다는 것.
나는 훈육의 중요성을 다시 복귀하되, 올바른 훈육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올바른 훈육이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글을 마무리했다.
글의 드래프트를 써서 편집자에게 보냈는데, 또 다시 욕을 먹었다. 글이 지루하다는 것이었다. 편집자는 이렇게 한 개념을 풀어서 쓰면 글이 지루해지니 그냥 양육과 관련해 정신과 의사로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다양하게 정리해서 기술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는 일반 양육 관련 서적에도 많이 나와 있고 해서 그걸 똑같이 되풀이하면 그냥 지루하기만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몇 번의 말이 오고 갔고, 편집자는 (돌려서) 요즘 내가 글의 스타일에 대해 고집을 부리는 것 같다는 식의 말을 했다.
나는 기분이 좀 상해서 '제 취향이 대중과 달라서 그런가봅니다. 솔직히 편집자님께서 보내주시는 글들을 읽으면 저는 재밌다는 생각도, 잘 썼다는 생각도 안 들거든요'라고 반발했다.
내가 굳이 내 취향을 바꿔야 할까? 사람들은 잘 읽히는 글이 좋다고 말하지만, 난 여전히 거기에 백퍼센트 공감하지는 못 하겠다. 만약 글을 '읽히기' 위해 쓰는 사람이라면 그게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어쩌면 내가 나 자신을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중들이 내 글을 읽어줬으면 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라고 말이다. 그런 욕망을 갖고 있었다면, 필시 사람들이 글을 읽어줬을 때 모종의 쾌감을 경험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오히려 나의 취향이 잠식당할 때 더 큰 박탈감을 느꼈던 것이다.
해당 매체가 나의 정치적 노선과 많이 달라 글을 계속 쓰는 게 윤리적으로 적절한가 고민을 하기도 했던 차에 (얼마 전에는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던 한 필자가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고도 들었기에...) 그냥 글을 중단하기로 했다.
편집자는 그동안의 정도 있고 하니 이번 글까지는 내 취향에 맞게 고치지 않고 올려주겠다고 하면서, 그래도 조회수는 많이 안 나올 것 같다는 말을 붙였다.
기분이 더 상해서 그런 거 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렇게 내 마지막 글은 내 폴더 속 구석 어딘가로 처박히게 됐다.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그래. 나는 글을 못 쓰는 게 아니다. 내가 그들의 취향을 맞춰주고 싶지 않을 뿐이다... 라는 정도의 자위라도 없다면 난 열등감에 절멸하고 말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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