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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사적인 정리

2014년 10월 9일의 일기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10. 9.

2014109일 어느 행복한 날 점심

 

- 요즘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순간을 묘사하고 기술하는 모습이 엄청나게 많을 것인데, 나에게 해당되는 모습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20살에 들어선 한 남학생이 고등학교 시절 내내 꿈꾸던 한 대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하게 되는 날. 그리고 첫 등교날 그 학교의 정문 앞에서 그 학생이 느끼게 될 어떤 무엇. 여기에는 뿌듯함과 어떤 포부, 그리고 기대감, 환희 등등이 적절히 배합되어 특정한 종류의 행복감을 만들어낸다. 내가 근래에 느끼는 감정 또한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오늘은 한글날이라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않는다. 조금 늦잠을 자고 나서 스쿠터를 타고 의료원으로 향했다. 가을이라 그런지 하늘이 기가막히게 맑고 깨끗하다. 공기도 너무 덥지도 차지도 않아 기분좋게 나의 볼을 때린다. 내 스쿠터는 분명 최고 속도 시속 80을 낼 수 있는 역능을 갖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그 역능을 발현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갓길을 사용해 의료원으로 향했다. 바람을 맞으며 주변의 들판을 바라보며 프로이트를 읽기 위해 의료원으로 향하는 길. 이것은 마치 놀이 공원에서 처음으로 놀이기구를 타게 될 때의 느낌과 비슷한 것은 아닌가. 지금 내 눈앞에 엄청나게 재미있는 것이 있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데, 저 뒤에는 그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들이 훨씬 많이 남겨져 있다는 바로 그 느낌. 지금 여기도 너무 재미있는데, 저 뒤에는 더 재밌는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바로 그 느낌.

 

- 나를 포부에 젖게 하고 기대에 빠지게 만드는 것들은 무지하게 많다. 저번 주부터 김석수 교수님의 정신현상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독일철학을 전공하신 분이라 바라보는 깊이가 다르시다. 근 몇 년간 헤겔의 주변부를 빙빙 돌았다는 느낌이 든다. 내 에너지의 흐름에 일종의 소용돌이 같은 것이 몇 개 있는데, 그 소용돌이 중 하나의 중심, 그 폭풍의 눈 중심부에는 헤겔이 있다. 폭풍의 중심에 다가가는 것은 힘들다. 다가가는 와중에 주변의 와류에 휩쓸려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버릴 수도 있고 아예 밖으로 튕겨져 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힘든 여정 중 내가 너무 크게 편위되지 않도록 바닥에서 누군가 일종의 정박점을 마련해줘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수업이 나에게 그러한 일종의 정박점을 제공해주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소용돌이를 지나가는 과정 자체는 힘들지만, (물론 힘들면서 동시에 쾌락적이고 중독적이기도 하다) 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이 와류 저 너머에 바로 소용돌이의 중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거기에서 엄청난 희열감이 몰려온다. 저 너머에 바로 그 무엇, 그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 어쩌면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환상은 내가 이곳에 빠져들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 영어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한 동안 프랑스어 공부에 빠져 있었다. 정확히 1년 전이다. 문성규 형님의 조언에 따라 이론적 내용보다는 독해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 공부를 하면서 생긴 질문은 - 난 과연 영어 자체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 영어의 베이스는 잘 잡혀있노라고 언제나 자신만만해 하던 나였다. 하지만 독해를 하면 할수록, 내 능력이 딸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나 프로이트나 들뢰즈의 문체가 쉬운 문체는 아니어서, 영어로 읽어나간다는게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석사논문을 영어로 쓰고자 계획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것들을 느낄수록 더더욱 큰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 영어를 한국어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읽는 수준을 만들자! - 결국 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프랑스어를 공부할 때보다,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영어를 공부하는 게 훨씬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다.

요즘은 수업 진도에 맞추어 프로이트의 저서를 매주 한 챕터 이상 영어로 읽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수강생은 한글 버전을 읽어올 것인데,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더더욱 나를 영어 원전에 빠져들게 만든다.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나는 해내야지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영어 원전을 읽으면서 번역이 잘 되지 않는 문장은 따로 워드로 정리해서 그 옆에 내가 제대로 보기 좋게 번역한 바를 적어놓았다. 이렇게 모아놓은 문장들을 그냥 통째로 외워버릴 생각이다. 외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데는 혁주의 의견이 큰 역할을 했다. 영어 작문 연습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혁주가 말하길, 작문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일단 영어 문장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뻔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는 그 말에 깊이 경도되었다.

 

- 철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나는 정말 이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곳에서야말로 나는 내가 나임을 느낀다. 내 안에 숨겨진 씨앗이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싹을 틔우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며칠 전 수업에서 스피노자의 potentia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워들은 거라 정확한 개념을 설명할 수 는 없겠지만, 대충 말해보자면 개체가 potentia를 발현하는 것은 필연이고 그 필연이 곧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필연인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필연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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