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내가 임신을 했다. 며칠 전부터 테스트기에 희미한 줄 두개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벌써 1.3센티미터나 됐단다. 나는 초음파 화면을 보며 "어이구 잘 크고 있네..."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심장은 뛰지 않지만, 이제 산모 수첩을 만드셔야겠는데요? 호호“ 의사 선생님이 우리를 자리에 앉혔다.
방금 전 초음파를 할 때만 해도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보던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이그 눈물이 났쪄요? 하고 아내의 어깨를 보듬어주는데 괜시리 나도 눈물이 찔끔했다. 아내는 당황스러워하며 자신이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의례적으로 정신과 의사들이 그러듯, 그럴 수도 있지라며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해줬다.
병원을 나오며 아내가 계속 중얼거렸다. 거 참 이상하단 말이야. 거기서 갑자기 왜 울음이 나왔을까? 고마운 것도 아니고, 미안한 것도 아닌데, 울 일이 전혀 아닌 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 있지. 참 이상해. 그 자리에서 그럴 수도 있다고 말은 했지만, 나로서도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혹시 대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엄마가 스트레스도 받고 했는데 묵묵히 잘 자라고 있어줬다는 게 대견해서? 음... 아니야 그것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아 복잡해. 뭔지 잘 모르겠어.
그 날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날 그 장소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방에는 분명 나와 아내, 그리고 의사 선생님 외에도 누군가가 또 있었던 것 같다. 말을 건넬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어떤 종류의 의미있는 소통을 할 수도 없었지만, 우리는 분명 우리의 소통 공간에 누군가 제3자를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만 같다.
생각해보면 며칠 전부터 비슷한 일이 계속 있었다. 목도리를 대충 둘러메고 나가려는 아내를 불러세워 "따뜻하게 입으라"는 잔소리를 했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런 잔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아내에게 이런 잔소리를 한 적이 있던가? 꼭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아내를 향해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내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도 있지만, 나는 분명 아내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말이 허공을 향해 울려퍼진다는 느낌이 퍽이나 요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어떤 애매한 영역 사이에 말을 던졌던 것도 같다. 그런 곳에 말을 던져본 적이 없으니 이상할 수밖에.
그런데 오늘은 ”잘 크고 있네“라는 나의 말이 어딘가로 가 닿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거기 그 자리에서, 누군가 내 말을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네가 거기에 있구나. 네가 거기에서 그렇게 크고 있구나라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게 퍽이나 나를 흔들었던 모양이다. 아직 존재의 지위를 부여받기는 턱없이 부족한 녀석이겠지만,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녀석과 우리의 첫 만남이 일어난 날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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