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인식 너머를 '물자체'로 통칭해 버린다. 마찬가지로 라캉에게 있어 '실재'란, 상징계 너머에 있는 무엇들의 통칭이다.
물자체나 실재계는 모두 인식 불가능한 하나의 '덩어리'이다. 물론 경계는 없는 덩어리.
그런데 이 물자체는 전혀 감지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물자체를 구조화까지는 할 수 있는가?
물자체를 구조화 하고 물자체의 구조의 '체계를 세우는 것' 까지는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물자체 내에도 분류를 나눠서 구조화할 수 있다. 실제로 칸트의 경우 A를 발견하면 A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A'라는 물자체, B를 발견하면 B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B'라는 물자체 등등 서로 다른 물자체들이 등장하는 것 처럼 보인다. A' 와 B'는 모두 같은 물자체라고 볼 수 있나? A'와 B' 사이에도 차이가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 그 '체계'자체가 우리 인간의 머리 한계 내에서 구성된 체계라는 것.
이런 예를 들어보자.어떤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
그 앞에는 이 움직이는 물체를 스크린으로 옮겨 표현해주는 기계가 있다.
그리고 또 그 앞에는 이 스크린에서 방출되는 빛을 통과시키는 천으로 된 막이 있다.
그런데 천으로 된 막이 종류가 두개다. 하나는 '가'이고 나머지는 '나'다.
'가'는 이를테면 정씨의 인식이고 '나'는 이를테면 김씨의 인식이다
'가'가 소급적으로 설정하게 되는 '가'의 물자체가 있을 것이다.
'나'가 소급적으로 설정하게 되는 '나'의 물자체가 있을 것이다.
'가'의 물자체와 '나'의 물자체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이번에는 '가'의 상황에만 국한해서 보자.
'가'는 천으로 된 막에서 보이는 이미지를 보면서 소급적으로 물자체'가'를 추론해 낼 것이다. 머리로. 그리고 그 물자체는 형태가 '스크린'과 유사할 것이다. 하지만 이 '스크린' 자체는 진짜 물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앞서 있었던 실제 움직이는 물체가 더 물자체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가'가 소급적으로 추론한 '물자체'개념은 '물자체'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면 물자체가 계속 변화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현상도 계속 변하고 그에 따라 물자체도 계속 변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 당연히 '한계'자체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한계 너머는 언제나 변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역추적'하는 인간의 능력. 어쩌면 인간의 인식은 모두 이 '역추적'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라마찬드란의 '채워넣기' 기능이 이와 유사할지도 모른다. 채워넣기의 개념은 우리가 가정하는 공백으로서의 주체와 유사할지도 모른다. 태풍의 눈.
칸트의 전제들 : 내부와 외부. 일단 촉발하는 외부가 있고 그 촉발을 당하는 내부가 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물자체 상정 가능하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지 않으면 물자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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