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의 틀로 보았을 때 나는 강박적인 (또 한편으로는 자기애적인) 성향에 속하는데, 나자신을 돌아볼 때면 항상 드는 의문이 있다. 강박적이라면 분석철학을 좋아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나는 분석철학보다 현대대륙철학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확실히 분석철학 쪽에 빠지는 사람의 '결'과 현대대륙철학 쪽에 빠지는 사람의 '결'이라는 게 좀 다른 면이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쉽게 설명할수 있는 방법은, 내가 강박적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비강박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다보니 즉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다보니 대륙철학에 빠졌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외에도 나르시시즘이 관여했다는 둥 이런 저런 설명이 가능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OC-Narcissistic merge같은 개념이 자꾸 등장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한다. '완벽주의'라는 것으로 대표될 수 있는 강박적 성격의 이면에는 두 가지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완벽을 추구하고 싶다는 것의 역동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자아가 작동하는 방식이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참과 거짓 사이의 구분과 관련해 초자아가 결벽과 강박을 종용하는 양상이다. 이 경우에서 누군가는 참과 거짓을 가르는 가운데 참에 해당하는 것을 강박적으로 추구하고자 할 것이다. 그는 정동에서 멀어지면서 사실 자체로, 지식으로, 이성으로 골몰하면서 참인 것에 매달리려는 경향을 가질 수 있다. 반면 다른 경우에서 초자아는 관계의 온전함, 관계의 안정성에 대해 통제감을 종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 경우 누군가는 진실을 추구하려기보다는 관계의 영역에서의 무결함을 추구하려 할 수 있다. 가령 누군가는 아빠에게 혼나고 싶지 않다,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 즉 관계를 훼손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불안을 느끼고 완벽을 추구하게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진실에 골몰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에게 진실에의 추구라 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훼손되지 않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과 완전하고 안전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그런 욕구에 기반한 것일 수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대변을 참는 것을 통제하는 것'이라는 초자아적인 주제 자체가 두 가지 얼굴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통제를 통해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가르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통제를 통해 관계의 안전성을 보장하는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전자와 후자 모두가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한 어떤 것에서 연유한다면서 이를 통합하려 하곤 하지만, 그렇게 환원될 수 없는 차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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