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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별걸 다 매뉴얼] 고속버스에서 책 읽고 싶은 자들을 위한 매뉴얼 - 2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3. 7. 16.

 


과도한 비약운동으로 외사시가 유발된 예

성질에는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성질이 포함된다. 말하자면, 달리는 버스의 물질적인 성질들, 그리고 그 버스가 달리는 노면의 물질적인 성질 등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일단 버스의 물질적인 성질을 고려해보도록 하자. 알다시피 버스의 물질적 구조 자체는 요동을 최소화하는 구조로 되어있어야 한다. 좌석은 너무 딱딱해서도 안되고, 너무 푹신하지도 않은 적절한 쿠션감을 유지해야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엔진의 떨림은 적어야 하고, 타이어의 바람은 빵빵히 들어가 있어야 하며, 바퀴의 완충작용이 충분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탈 버스를 분석한답시고 이리저리 뜯어보다가는 기사 아저씨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 있을 뿐더러 이런식의 분석을 통해 버스를 하나하나 가려내다가는 결국 시간맞춰 버스를 못타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버스 자체의 물질적 구조는 그냥 분석의 대상에서 던져버리기로 하자.

이번에는 노면의 성질을 고려해보도록 하자. 노면의 성질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째, 잘 알다시피 노면 불량은 멀미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 째, 그것이 '비약 운동(Saccadic movement)'의 유지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비약 운동이란 독서할 때 글줄을 따라 시선이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운동을 이야기하는데, 노면이 울퉁불퉁한 경우 시선이 글줄로 부터 이탈하는 횟수가 증가하게 돼 집중력이 심하게 감소하게 된다. 여기서 노면의 성질이 독서기능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사고실험을 해보도록 하자. 멀미 여부는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멀미이 영향은 배제하도록 하겠다. 이 실험에서 각 요소는 아래와 같다.

1. 가정
- 버스를 탄 사람은 멀미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며, 따라서 멀미 여부는 독서 가능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위아래로의 진동이 좌우로의 진동보다 독서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좌우로의 진동은 무시하도록 한다.
- 책을 읽는 동안 조명이 꺼지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2. 변인
- 책의 글자 크기 (S)
- 버스의 위아래로의 흔들림 즉, 진동수 (f)
- 진동의 진폭 (A)

3. 종속 변인
- 단위 시간 동안 읽는 글자 수 (L)

4. 통제 변인
- 책의 줄 간격
- 책의 난이도
- 사람들의 책 읽는 집중력

 

사고 실험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독서가 잘 되는 정도를 '단위 시간당 읽은 글자수'로서 대표할 수 있다.
2. 책의 글자 크기가 큰 경우 어느 정도 진동이 있어도 비약 운동이 크게 방해되지 않는다.
3. 버스가 단위시간 당 위아래로 진동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비약 운동은 제약을 받는다.
4. 버스가 진동하는 진폭이 클수록 비약 운동은 제약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파동 에너지는 f의 제곱과 A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적절히 비례상수 k를 정하여 각 요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겠다.

L = S/(k * f² * A²)

즉 단위시간 동안 읽은 글자수(L)는 글자크기(S)에 비례하고 진동수(f)의 제곱 및 진폭(A)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그렇다면 각 요소를 조절하기 위해, 즉 책 읽기 좋은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환경 조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다시 말해 L의 값을 증가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단 진동수(f)와 진폭(A)의 측면을 살펴보자. 이 두가지 요소는 노면의 성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우리 의지로 바꾸기 힘든 것에 속한다. 그러므로 본인의 출근길 혹은 귀향길의 이동경로가 큰 f 및 A 값을 갖고 있다면, 책 읽는 것은 포기하도록 하자. 득보다는 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버스를 타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 시간동안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배기겠다!' 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물론 이런 경우에도 희망은 있다!!! (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S의 값을 충분히 크게 한다면, 비약 운동을 어느정도 선에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S의 값이 큰 책을 구비하는 것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림책을 읽는게 아니고서야...) 이 해결책도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제2계기는 양의 측면을 포함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양'은 주로 책의 분량을 말한다. 우리는 제1계기에서 단위 시간당 읽는 글자 수 L = S/(k * f² * A²) 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제2계기에서 말하는 '책의 페이지 수'는 책을 읽는 효율인 L과 관련된 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제2계기에서 말하는 책의 페이지 수는 '얼마만큼의 페이지 수가 최대 독서 효율을 내는가?' 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보다는 '얼마만큼의 페이지 수가 고속버스 안에서 읽기에 적당한가?'와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고속버스에서 책을 읽을 때는, 일단 책을 선택한 뒤에 효율적으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어떤 책을 선택하는가가 더 중요한 요인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책을 선택할 때에 '페이지 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기능하게 된다. 논의를 진행시키기 전에, 독서라는 것이 갖는 다음 특징들을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1. 새 책을 읽을 때 보다 읽다 만 책을 읽을 때 더 재미가 없다.
이건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책은 새책일수록, 그리고 아직 편 지 얼마 안됐을 수록 더 집중이 잘 된다. 이런 특징은 모든 종류의 책에 통용되는데, 이를테면 수학 문제집 같은 것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종종 옆자리 친구의 수학문제집이 항상 1단원까지만 필기로 지저분해져있는 것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2. 지정된 시간 안에 한 권을 다 읽었을 때 성취감이 크다.
이것은 1.번과 그 심리적 기제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간에 어정쩡하게 그만두는 것보다는 목표한 양을 제대로 끝내는게 성취감을 더 높여주게 된다. 한편, 지정된 시간에 목표한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학습의 효율과도 연관이 된다. 이를테면, 내가 3일 동안 ABC 세권의 책을 읽기로 계획했다고 했을 때, 오늘 다 읽기로 했던 A라는 책을 채 절반밖에 읽지 못했다고 한다면, 나머지 절반의 양은 이틀째 하루 내내 읽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B까지 같이 읽기에는 뭔가 제대로 분절이 제대로 되지 않은 느낌이 들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학습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효율성을 위해, 책의 뒷부분은 제대로 읽지 못하더라도 빨리 읽어서 한권을 끝내버려야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성취감이야 한 권을 다 끝냈을 때 더 크다는 걸 인정할 수 는 있어도, 학습의 효율은 반드시 한권을 끝내야만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반문할 수 도 있다. 대표적인 반례로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를 들 수 있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한 때 라캉이 관심을 가지기도 했던 현상의 하나로, 완성된 일보다는 완성하지 못한 일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심리적 효과를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어떤 책을 완전히 다 읽었을 때보다 뒷부분 일부를 읽지 못한 채로 애매하게 끝냈을 때 읽은 내용을 더 잘 기억하게 되는데, 그 근저에는 '일을 다 끝내지 못했다는 불안감'으로 인한 '심리적 긴장감' 내지 '주의집중'이 기억력을 더 강화시켜주는 메커니즘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성취감은 한권을 다 끝냈을 때 높지만, 학습의 효율성은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높다."


블루마 자이가르닉 (1901-1988)

3. 차 안에서는 필기를 하거나 밑줄을 치기 힘들다.
어려운 책 혹은 새로운 개념을 담고 있는 책은 필기 또는 밑줄치기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펜을 쓴다는 것은 왠만한 기능인이 아니고서야 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펜을 사용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멀미를 유발한다는 이유 때문에도 나쁘지만, 책상 위에서보다 버스 안에서는 필기에 요구되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에는 버스가 흔들림으로 인해 잘못 표기된 필기를 지우게 됨으로써 연장되는 시간도 포함된다.) '상대적인 책의 페이지수'를 늘린다는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진다. 그리고 이런 측면은 다시 1번과 2번으로 연결되면서 그 단점을 드러내게 된다.

4. 자신이 친숙하지 않은 문장구조로 쓰여있거나,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책 또한 '상대적 페이지 수'를 늘리는 경향이 있다.
이 측면에 대해서는 부가적인 설명을 안해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추가적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위와 같은 특징을 가지는 책들이 상대적인 양을 늘림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가 1계기에서 이야기했던 효율 L에도 실제로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는 책, 또는 친숙하지 않은 문장구조로 이루어진 책은 문장 자체에 시선의 고정을 더 강하게 요구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비약 운동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크게 증가하게 된다. (쉽게 말해, 같은 문장을 여러번 반복적으로 읽거나, 한 문장을 굉장히 느린 속도로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로 인해 멀미를 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전에 제1계기에서 우리는 '책의 수준'과 '읽는 자의 수준'을 통제시킨 바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책을 읽는 효율 L에도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델의 단순화를 위해 이 두 가지를 통제시켜야만 했던 필자의 입장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얼마만큼의 페이지수' 또는 '어떤 특징을 갖는 책'이 고속버스에서 읽기 적당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결론
1. 한번 시작해서 거의 다 끝낼 수 있는 책이 좋다.
2. 자신이 친숙한 문장구조로 쓰여진 책이 좋다
3. 쉬운 책이 좋다.
4. 필기하지 않아도 되는 책이 좋다.

그러니 고속도로에서 책을 읽고자 하는 자들은 버스를 타러 갈 때에 바로 챙겨갈 수 있도록 위의 특징들을 갖고 있는 책들을 따로 미리 분류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방식은 '평소에 어려운 책 읽기 + 버스 안에서는 그 책과 연관된 쉬운책 읽기'의 콤보다. 이를테면 들뢰즈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고 할 때, 평상시에는 들뢰즈의 저서 또는 수준이 높은 해설서를 읽는다. 그리고 고속버스를 안에서는 비교적 얇고 평이한 문체로 쓰여진 들뢰즈 개론서 같은 것을 읽는다. 원작자의 저서나 수준 높은 해설서는 자세한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반면 큰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반면 평이한 개론서는 제사한 부분에 대한 설명에는 약한 대신 개괄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큰 도움을 준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조합은 숲과 나무를 골고루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고 볼 수 있다.



------ 다음 시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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