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를 직접 보고 싶은 사람은 아래의 글을 읽지 말길 바란다. 하지만 그냥 글로 이 영화의 내용을 미리 '보아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사람은 읽어도 좋다.
[줄거리]
커티스는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는 토목 기사다. 그에게는 아내 사만다와 딸 해나가 있다. 딸은 어릴 적부터 청각 장애를 앓고 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딸을 위해 커티스와 그의 아내 사만다는 딸의 손을 잡고 틈틈이 수화를 배우러 다닌다.
커티스와 사만다는 해나에게 일상의 사물들을 수화로 설명해주곤 한다. "이건 빵이야. 이 빵 맛이 있니? (손으로 빵을 가리킨 후 입가를 가리키면서)" 창 밖으로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보고 사만다는 딸에게 말한다. (두 손을 둥글게 말아 마주보게 한 뒤 빙글빙글 돌리며) "폭풍우"
그런데 어느 날부터 커티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악몽은 일주일 넘게 지속된다.
첫 번째 날 밤, 꿈 속에서 그는 폭풍우가 몰려오는 것을 본다. 비가 쏟아지는데, 빗물의 색깔이 노랗다. 엔진 오일 색깔 같다. 커티스와 딸 해나, 그리고 그들이 키우는 강아지 레드는 같이 비를 맞는다. 그런데 비를 맞던 레드가 갑자기 왕왕 짖어대더니 자신의 오른팔을 문다.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그는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꿈인데 아직도 오른팔이 아프다. 그 이후로도 그는 꿈속에서 비슷한 폭풍우를 보게 된다.
커티스는 이건 꿈에 불과하다며 스스로를 위안하려 하지만, 어딘가 켕기는 느낌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가 꿈에서 느꼈던 그것들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지금 이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는 것만 같다. 게다가 그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비슷한 환영을 목격하게 된다. 마른 하늘에서 갑자기 엄청난 크기의 천둥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옆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 듀워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커티스는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강아지 레드를 집 밖 울타리 속에 가둔다. 레드가 언젠가 딸 해나를 공격할 것만 같다. 하지만 아내 사만다는 왜 집 안에서 잘 지내던 강아지를 굳이 밖에 가둬놓는거냐며 핀잔을 준다. 해나가 레드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해나를 슬프게 만들 작정이냐고 토로하면서. 커티스도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싶어하지만, 도대체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부터가 막막하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못한다. '난 그저 그래야 한다고 느낄 뿐이야…'
그 때부터 커티스는 다가오는 폭풍우에 대비하기 위해 집 앞마당에 방공호를 짓기로 한다. 땅을 파내고, 컨테이너 박스를 집어 넣은 뒤, 환기구를 설치하고 그 안에 제반 생필품들을 집어넣어야만 한다. 하지만 혼자서 하기엔 너무 벅차다. 그는 그의 단짝 듀워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회사에 있는 크레인을 빌려서 땅을 파는 것 좀 도와줘" 듀워트는 친구의 부탁에 흔쾌히 응한다. 참 좋은 친구.
그 날 밤, 꿈 속에서 그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 듀워트는 예의 그 노란색 빗물을 맞고는 갑자기 광기에 휩싸여 커티스에게 흉기를 휘두른다. 커티스는 공포에 휩싸여 잠에서 깨어난다. 침대보가 젖었다. 그 때부터 커티스는 자신의 몸이 어딘가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식은 땀을 흘리며 일어난 그를 보고 걱정이 된 사만다가 침대로 다가간다. 그러자 커티스는 역정을 내기 시작한다. 젖은 침대보를 보여줄 수는 없기에. 하지만 사만다는 그런 사나운 커티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 이건 분명 내 정신상태와 관련돼 있을지도 모른다. 커티스는 보호소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가 9살 무렵 어느 날 그의 어머니는 가족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행방불명 되어버린다. 수색 끝에 찾아낸 그의 어머니는 어느 허름한 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어머니는 그 이후로 쭈욱 보호소에 갇혀 생활하고 있다. "어머니, 혹시 예전에 이상한 경험을 했다거나 하진 않았나요?"
이 문제가 자신의 정신상태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거란 생각에 커티스는 도서관에서 정신질환과 관련된 책자를 찾아보기에 이른다. 하지만 자신의 증상을 명확히 설명하는 부분을 찾기는 힘든 것 같다. 커티스는 주치의를 찾게 된다. 주치의는 정신과 의사를 추천해주지만, 의료비가 무지막지한 미국 땅에서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을 형편이 못 된다. 결국 진정제 몇 알을 챙겨 돌아오는 커티스. 하지만 진정제를 투여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환영이 계속되면서, 결국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 사만다가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환영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아. 내가 왜 이러는걸까. 이래서는 안돼. 나는 절대로 우리 어머니처럼 가족들을 내버리지 않겠어. 난 반드시 괜찮아져야만 해. 커티스는 진정제 투여량을 늘려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날 밤, 커티스는 경련을 일으키며 피를 토하게 된다. 이에 놀란 사만다가 묻는다.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왜 말을 안해주는거야?"
더 이상 숨길 수는 없다는 생각에 커티스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에 이른다. 내가 레드를 밖으로 쫓을 수 밖에 없는 건 해나를 위해서였어… 그리고 며칠 전에는 당신이 나를 공격하는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어… 게다가… 난 어제 사장에게 내 친구 듀워트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 이제 난 무슨 낯짝으로 듀워트를 만나지?
사만다는 그의 행동들이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가 그의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그런 행동들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 이 남자는 지금 정신적으로 어딘가 큰 문제가 있음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나의 남편이자 해나의 아빠다. "여보. 우리 바닷가에 놀러가기 위해 모아뒀던 돈, 그냥 당신 치료를 위해 쓰도록 하자. 나도 당신을 위해 힘쓰도록 할게."
사만다는 커티스가 일상생활의 감각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지역사회 모임에 그를 데리고 나간다. 커티스는 마음 내키지 않지만, 자신의 갱생을 위해 노력하는 아내를 생각해 나가기로 결심한다. 모임에 나간 커티스와 사만다, 그리고 해나가 오붓이 모여 앉아 뷔페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아마도 듀워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나의 정신상태에 대해 소문을 내고 다녔으리라. 이 분위기를 참을 수 없지만, 커티스는 아내와 딸을 위해 그냥 참기로 한다.
그 때, 식탁으로 한 남자가 접근한다. 듀워트다. "이런 배신자. 니가 그러고도 내 친구냐? 나를 그렇게 직장에서 쫓아낼 수가 있는거야?" "듀워트. 지금은 싸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윽고 듀워트의 주먹이 날라오고, 격투가 벌어진다. 커티스의 온 몸이 음식물로 뒤덮였다. 갑자기 격분한 커티스는 식탁을 뒤엎고 일어나 소리지르기 시작한다.
"이 처량한 인간들아! 너희들은 내가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이 멍청한 인간들아. 지금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어! 너희가 지옥불에 떨어지고 나서도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을지 어디 두고보자!!!" 그리고는 갑자기 흐느끼는 커티스. 자기 자신도 자기가 왜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가 없다. 사만다와 해나가 다가가 커티스를 보듬는다. 괜찮아… 우리가 보호해줄게. 아픈 사람.
그런데 그날 밤, 난 데 없이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태풍 경보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커티스는 겁에질려 사만다와 해나를 데리고 방공호로 피신한다. 그리고는 사만다와 해나에게 준비해 놓은 방독면을 씌우려고 한다. "잠깐. 근데 이것까지 꼭 써야만 해?" 라고 반문하는 사만다. "미안해. 어쩔 수 없어. 나도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걸 써야만 하는 것 같아서 그래. 부탁이야. 꼭 써줘." 사만다는 커티스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따르기로 한다.
이내 잠들어버린 세 가족.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사만다는 커티스를 깨운다. 어느 새 두 모녀는 방독면을 벗고 있다. "이제 방독면은 벗어도 될 것 같아." 하지만 커티스는 끝까지 방독면 벗기를 거부한다. 그런 그를 설득하는 사만다. "괜찮아. 폭풍우는 이미 끝났어. 이제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아."
"자. 당신이 열쇠로 저 문을 열어줘야 해. 그래야 나랑 해나가 나갈 수 가 있지." 사만다가 차분히 커티스를 설득한다. 하지만 커티스는 마음 한켠이 꺼림칙 하다. 아직 바깥에서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 것만 같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커티스가 말한다. "미안해 여보… 너무 두려워서 문을 열 수 가 없어…" 사만다에게 열쇠를 내미는 커티스. 하지만 사만다는 그 열쇠를 받지 않는다. "이 문은 당신이 열어야만 해. 난 당신이 우리를 위해 열어줬으면 좋겠어."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집어든 커티스는 한참의 망설임 끝에 문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여는 순간, 화창한 날씨가 그들을 맞는다. 생각보다 폭풍우는 심하지 않았다. 나무 몇 개가 부러져 있고, 전신주가 망가졌을 뿐, 집이나 그 외 다른 것들은 모두 멀쩡하다. 커티스가 걱정했던 것에 비해, 피해는 적었다. 천만 다행이다.
커티스는 사만다의 손을 잡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이제는 치료해도 괜찮을 것 같다. 커티스와 상담을 끝낸 의사가 말한다. "치료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릴겁니다. 입원치료가 필요해요." "그럼, 내 가족을 떠나라는 말입니까?" 커티스가 묻는다.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마주보며 눈빛을 교환하는 사만다와 커티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게 최선의 선택인 것 같다. "입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해변에 놀라갔다 오는 건 괜찮겠죠?". 의사는 그들의 여행을 허락한다.
바닷가.
해나와 커티스는 모래사장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사만다는 이들을 위해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해나는 말은 안하지만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순간, 해나가 갑자기 일어나 바닷가 쪽을 가만히 응시한다. 이상한 표정을 짓는 해나. 열심히 모래성을 쌓던 커티스는 그런 해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왜 그러니 해나야?" 해나는 바닷가와 아빠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배 근처로 두 손을 가져가 어떤 제스쳐를 취하기 시작한다. 그래. 아마도 수화인 것 같다! "응, 그래 해나야, 다시 말해봐. 무슨 말이니?"
(두 손을 둥글게 말아 마주보게 한 뒤 빙글빙글 돌리며) "폭…풍…우…"
해나를 안고 일어나 해변을 바라보는 커티스.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테라스로 나오는 사만다. 해나를 안은 커티스가 뒤를 돌아보고, 사만다와 눈이 마주친다.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커티스는 해나를 안고 테라스로 뛰어들어온다. 이윽고 비가 내리면서, 사만다의 손등을 적시는데, 비의 색깔이 이상하다. 노랗다. 엔진오일 색깔이다. 망연자실해 해변을 바라보고 있는 사만다에게 커티스가 말한다. "사만다?". 그리고 사만다가 대답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어." 그리고 영화의 끝.
[해설]
[불안, 그리고 직감]
이 영화는 세계 해석에 대한 영화다. 우리는 살면서 이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해석의 도구는 여러 가지다. 단순 감각, 배운 내용, 습득한 내용, 편견, 이성, 등 모든 것을 이용해 우리는 이 세계를 해석해 나간다. 하지만 [테이크 쉘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해석 방식은 '직감'에 의한 것이다. '직감적으로 안다'라는 말이 있다. 직감. 그것은 합리적인 계산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느낌, 근거를 붙이고 싶지만 붙일 수 가 없는 그런 것. 영화에서 커티스의 행동을 추동하는 원동력은 그의 직감이다. 그는 말로 설명은 못하지만,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직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직감 [명사] : 사물이나 현상을 접하였을 때에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아니하고 진상을 곧바로 느껴 앎. 또는 그런 감각.
그렇다면 그가 행동의 추동력으로 직감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합리성을 끌어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그의 직감이 어디서 발원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불안이다. 내가 속한 세계가 이전과 달리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어딘가 이 세계가 이전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 차라리 명시적으로 손상된 세계의 일부가 내게 보여진다면 차라리 불안이 덜하다. 그런 명시적 근거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불안은 그 본성상 기원을 알 수 가 없기 때문에, 즉 우리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당최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단순히 직감에 의존해 특정한 방향을 향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직감이라는 것은, 그것의 사전적 의미에도 드러나 있듯이, 증명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직감에 의존한 세계 해석은 그 어느 것보다 비판을 받을 여지가 크다. 언제나 시험대에 오를 위험에 처해 있다.
[나는 나를 얼마나 믿어야 하는가?]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나의 해석도, 당신의 해석도 완전하지 못하다. 이 때 당신의 세계 해석이 비교적 비범한 경우(그리고 '비범함'은 많은 경우 '직감적임'과 큰 공통 부분을 가진다), 그것은 반드시 시험대에 오르는 운명에 처해 있다. 커티스의 그것(폭풍우가 몰려온다는, 세계가 멸망한다는 해석)도 마찬가지여서, 커티스는 자신이 믿는 바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신념을 시험 당하게 되어 있다.
직감에 의존하는 신념은 그것이 특정한 근거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불완전함과 동시에 완전하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남에게 말로써 설명을 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완전하다는 것은, 그 신념의 당위성이 '몇 몇의 셀 수 있는 근거들'에 의존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신념들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근거들이 부정될 때에 그것의 존재 이유가 말살되어 버린다. 하지만 '직감'같은 신념은, 그것이 토대로 갖고 있는 근거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만큼 또한 논리적으로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몇 몇 개의 근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신념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에 대해 적절한 예가 있다. 당신이 남자라면 종종 이런 모순에 빠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여자 친구가 당신에게 묻는다.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뭐야?" 남자가 말한다. "에이 내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너를 사랑하겠니?" 여자가 대답한다. "쳇… 뭐야 남들은 자기 여자친구가 예쁘다 성격이 좋다 뭐 이런 거 얘기하는 데, 너는 나에게서 그런 좋은 점 같은 걸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는가 보지?" 별 수 없이 남자가 답한다. "응… 일단 너는 성격이 명랑하고, 코가 오똑하니 얼굴이 예쁘고 또 옷을 잘 입는 것 같아서 좋아" 그러자 여자가 대답한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안 좋은 일을 당해서 침울해지거나, 사고를 당해서 코를 다치거나, 돈이 없어서 옷을 못 사 입으면 나에 대해서 흥미가 떨어지겠네?"
하지만 직감의 완전성은, 내가 설득시켜야 할 대상이 나 자신에 국한되어 있을 때에야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 나 혼자 어떤 것을 옳다고 느끼고, 그대로 행동하는 데에는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신념과 그 신념의 이행이 타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직감은 완전성을 잃게 된다.
일반적인 대중들과 다른 통념과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고달프다. 고달픈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째로, 독특한 세계 해석은 언제나 보편적인 세계 해석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 보편적인 세계 해석을 지닌 대중들은 특정인의 독창적 세계 해석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초래할까 두려워 그 특정인을 적대적 관계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둘 째로, 아무리 강한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계속해서 주변의 공격을 받다 보면 더 이상 신념을 지키기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독창적 세계 해석은 스스로를 회의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래. 정말 사람들 말처럼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 도 있어. 내가 틀리고 저들이 옳은 것일지도 몰라…"
이처럼 수많은 공격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우리 자신을 믿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믿어도 좋은가? 우리의 신념은, 유지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신념을 지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시험과 검증 과정을 맞이하게 된다. - "당신이 도대체 그렇게 믿는 근거가 뭔데?" "그건 그냥 너의 생각 아니야?"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믿는 것이 옳다고 느껴진다면? 이 때 우리는 그 신념을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가? 폐기해야 하는가?
이 상황에서, 우리는 시험과 검증을 받아들이든지, 혹은 거부할 수 도 있다. 시험을 거부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세계 해석을 거부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우리는 독재자가 된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주변 사람에게 강요하는 광신도들의 모습을 보라. 자신의 세계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광신도들. 필연적으로 다른 세계 해석을 배제해 버릴 수 밖에 없는 광신도들의 신념 체계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독재자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독재적 세계 해석이 그것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타자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이다. 만약 독재자의 해석이 옳은 것이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다른 타자들의 안위를 보증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영화 속 커티스는 시험을 받아들인다. 시험을 받아들인다는 한에서 커티스는 가장 인간적이다. 계시적 환영에 시달리는 커티스를 보면서, 혹자는 그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계시를 느끼고, 계시에 따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홍수를 예지하는 노아의 모습을 겹쳐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말하건대, 커티스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캐릭터다. 그는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현대적인 인간이다. 자기 회의와 이성의 자기반성으로 똘똘 뭉쳐있는 그런 현대적인 인간. 시험을 받아들이는 인간.
나의 해석이 불완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끊임없는 비판을 요구한다. 그 비판의 주체는 타자이면서 동시에 나다. 타자들의 세계 해석과 나의 세계 해석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해석을 계속해서 유지할 것인지 말 것인지 끊임없이 검증해볼 수 있다. 또한 나 스스로가 나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검증해 나가야 한다. (나는 나를 설득시킬 수 있는가? 이것은 나에게 아직도 유지될 만한 해석인가?) 해석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이용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최신의 과학 지식이라든지 그 외 제반 학문들, 또는 전승되어 내려온 조상의 지혜라든지 등등. 영화 속 커티스는 이처럼 검증하는 주체로서의 우리 모습을 닮았다. 커티스는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끌어와 그의 세계 해석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비판해보고자 한다. 혹시나 심신이 지쳐서 그런 것은 아닐까 진정제를 먹어보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정신질환과 관련된 책을 빌려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나의 해석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내 해석의 약화를 동반하게 되지 않을까? 결국 나의 세계 해석은 사장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절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시험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해석을 약화시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커티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회의해보고 자신의 신념을 의심해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방공호 짓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라이온스 클럽 회원들에게 폭풍우가 몰려온다고 소리치는 그의 모습을 보라. 그는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 자신의 해석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우리의 해석을 버려야만 다른 해석들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세계 해석이 옳다고 느끼는 그만큼, 다른 해석들도 그만큼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이들의 세계 해석이 불완전함을 갖고 있는 그만큼, 나의 해석 또한 불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나의 세계 해석을 검증하겠다는 의지는 그것 자체로 나의 세계 해석을 보존하겠다는 의지와 동일하다. 검증과 시험을 거치지 않은 해석은 언제나 나의 세계 안에서 맴돈다. 타인에 의한 검증이라는 시험대를 거치고 나면서부터 나의 해석은 고립된 나 개인의 세계를 벗어난다. 끊임없이 나의 세계 해석을 검증하되 내가 옳다고 믿는 한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테이크 쉘터]야 말로 이런 인간의 운명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그러한 인간의 좋은 본보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방공호, 아버지, 그리고 가족]
도대체 방공호는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방공호와 커티스의 신념 사이의 포함 관계는 어떠한가. 커티스의 신념만으로 방공호의 존재 이유가 모두 설명될 수 있는가? 즉, 방공호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 해석을 양보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인가? 방공호를 둘러싸고 우리는 아버지의 의미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결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커티스의 방공호 제작에는 두 가지 동기가 병존하고 있다. 첫 째는, 그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둘 째는, 가족의 안전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 방공호를 포기하는 것은 곧 아내와 딸의 안전을 포기하는 것과 같기에, 커티스는 방공호에 대한 집착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방공호에 설치할 방독면을 사기 위해 상점에 간 커티스는, 그의 딸 얼굴에 맞는 방독면을 찾는 데에 까지 신경을 쓴다. 그에게 방독면은 꼭 세 개가 있어야만 한다. 방공호 안에 침대가 적어도 두 개는 있어야 하고, 여자인 아내와 딸을 위해 양변기를 설치해야만 한다.
아버지로서의 딜레마. 자신의 세계 해석이 대단히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동시에 그것이 가족의 안전과 직결돼 있을 때, 가장으로서의 나는 그 해석을 포기해야 하는가? 계속 끌고 가야만 하는가? 이런 딜레마는 끝까지 커티스를 괴롭힌다. 방공호를 짓게 되면 대단히 많은 돈이 들게 되고, 그런 만큼 가족의 재정 상황이 어려워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커티스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 방공호를 짓게 됨으로써 피해보게 되는 것은 돈 몇 푼이지만, 그것을 포기하게 됨으로써 맞게 될지도 모를 위험의 크기는 너무나도 크다. 그런 면에서 커티스의 결단은 의미가 있다. 설사 영화 말미에 폭풍우가 몰려오지 않았다고, 즉 커티스의 신념이 틀렸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렇다면, 커티스의 방공호 제작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인가?
아버지를 둘러싼 가족들의 의미도 생각해 봄 직하다. 사만다와 해나가 갖는 의미는 두 가지다. 그들은 가족임과 동시에 시험자다. 하지만 이 두 계열은 완벽하게 양립하지 못한다. 즉, 시험자로서의 기능이 강해지면, 그만큼 가족으로서의 기능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영화 초반 사만다는 시험자로서 기능한다. 그녀는 동네의 다른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시선으로 남편을 대한다. 남편은 단지 '요즘 어딘가 괴상할' 뿐이다. 남편의 행동은 그녀의 해석 틀로 전혀 해석되지 않는다. 난데 없이 방공호라니. 그것도 주택 보증 대출을 얻어서!!!
이런 남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극 초반의 사만다는, 이후 커티스와의 대화로 인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커티스는 용기를 내어 그의 해석 틀을 제시한다. 그는 꿈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 꿈의 내용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이야기 한다. 또한 그가 자신의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사만다와 해나를 위해서라고 이야기 한다. 그 지점부터 시험자로서의 사만다는 아내로서의 사만다로 조금씩 변화해 간다. '그래. 사실 내가 아직 당신을 이해는 못하겠지만, 당신이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이해하겠어. 그리고 당신이 어딘가 아파서 그런거라면, 나도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할게.'
사만다는 시험자로서의 시선을 전혀 버리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으로서의 커티스를 내치지는 못한다. 어쨌거나 그는 나의 남편이다. 내가 보듬어주어야 할 남편이다. 라이온스 클럽에서 소리를 지른 뒤 흐느끼는 커티스를 감싸 앉는 사만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종반부 방공호 속에서 사만다에게 열쇠를 건네주는 커티스. 하지만 사만다는 열쇠를 받지 않는다. 열쇠를 받아 쥐게 된다면, 사만다는 커티스의 세계 해석을 방치해 버리는 것이 된다. 커티스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게 만듦으로써, 사만다는 커티스의 세계 해석을 긍정함과 동시에 커티스의 세계 해석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한편 가족은 커티스가 가장 먼저 설득시켜야만 할 존재들이다. 그의 세계 해석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단계이면서 동시에,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단계인 것이다. 아버지 커티스는 자신의 해석이 가족들에게 독단적으로 주입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 여기서 독특하게 두드러지는 캐릭터는 해나다. 해나는 사만다와 달리 세계 해석에 열려 있는, 편견이 없는 존재로 부각된다. 방공호 밖으로 나가자는 사만다를 보면서, 커티스는 아직 폭풍우가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며 사만다를 설득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만다의 해석에 따르면 이미 폭풍우는 끝났다. 이 때 커티스는 사만다와 투쟁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해나에게로 향한다. "(손짓으로 진동을 표현하면서) 해나야, 진동이 느껴지지 않니?" 그런데 여기서 커티스가 마지막에 해나에게로 향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인이 되면서 우리는 수많은 세계 해석을 접하고, 수많은 감각 차원을 접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성인은 비교적 중립적인, 순수한 판단 기준을 가지지 못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언급했듯이, 시력을 포함한 인간의 감각은 인간을 아주 잘 속인다. 이런 측면에서 해나의 청력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더욱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감각의 속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 편견에서 자유로운 해나. 커티스는 그 해나를 최후의 시험자로서 마주대하는 것이다. 해나는 가장 순수하게, 그의 세계 해석을 평가해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이런 측면에서 영화 말미에 해나에 의해 커티스의 세계 해석이 긍정되는 시퀀스는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그 누구도 아닌 해나라는 존재를 통해 커티스의 해석이 긍정됨으로써, 우리는 그 순간에 그의 신념이 옳았음을, 그리고 그가 끝까지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옳은 행동이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해나에 의한 커티스의 세계 해석의 긍정, 그리고 그것의 의미]
영화에서 커티스의 세계 해석이 긍정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일단, 그 결말은 이 세계가 아직도 열려있으며 아직도 해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혹자는 세계가 열려있지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 꼭 이처럼 비현실적인 결말을 보여줬어야만 하는가 하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왜 꼭 신적인 계시나 환영, 그리고 근거 없는 폭풍우나 비과학적인 노란색 빗방울이 도용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비현실적 요소들은 영화의 극적인 측면을 부각하기 위해서일 뿐,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지, 이 세계가 '비현실적인' 방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동시에, 해나에 의한 긍정은, 커티스의 노력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해나는 거기서 "아빠, 아빠 말이 옳았어. 아빠가 그 신념을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거기에서 "너의 신념을 포기하지 말라" 라는 어떤 명령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엄청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신념을 고수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그것이 헛된 일은 아닐 수 도 있다는 것. 언젠가 우리의 신념, 우리의 세계 해석은 긍정될 수 도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로 인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해석되지 않는 열린 세계, 그리고 신념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필자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그 중에서도 [사인]과 [레이디 인 더 워터]가 가장 많이 떠올랐다. 두 영화는 사실 [테이크 쉘터]보다 더 비현실적인 요소를 차용한다. 하지만 메시지는 비슷하다. [사인]에서 주인공은 도무지 정합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기독교적 세계 해석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할지, 폐기해야 할 지 망설이게 된다. 그의 세계에 대한 회의감은 아들의 천식 증상과 수돗물에 대한 딸의 기행, 그리고 아내의 죽음에 기반하는데, 영화는 종국에 기독교적 세계 해석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끝난다. [레이디 인 더 워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새로운 세계 해석을 제시하는 주체가 갑자기 등장한 소녀(요정)으로 되어 있는데, 요정을 발견한 주인공은 그녀의 세계 해석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다. 그가 보기에 이 세계는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참했던 자신의 삶의 궤적, 그리고 의미 없는 삶을 유지하는 듯한 아파트 주민의 군상들을 보면서 그는 소녀의 세계 해석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실제로 모든 것은 의미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소녀의 세계 해석이 긍정되면서 영화가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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