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되지 않아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본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닌 나 자신이 되려는 것처럼 고단한 일도 없다. 우리는 왜 얼룩말이면서 사자가, 반대로 사자이면서 얼룩말이 되고 싶어하는가. 이럴 때면 숙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숙명은 분명 체념과 다르다. 체념은 얼룩말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지만 숙명은 나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얼룩말을 살아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체념은 아예 일을 못하게 만들지만, 숙명은 자기 수준에 맞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만든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분명 자기 생겨먹은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일수록 일을 쉽게 쉽게 처리하기 마련이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수두룩한 번아웃의 사례들이 숙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연결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숙명을 사유하는 방식은 고작해야 기독교 (하느님 아버지에게 순명하나이다)나 불교 (바꾸려 하지 말라)를, 또는 무속신앙 (사주팔자에 따라야지...) 을 경유할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경전의 구절에나 나올 법한 우화 또는 마법적인 개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숙명의 개념을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고대 철학자들이 가졌던 숙명의 개념을 현대에 부활시킬 방법은 없겠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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