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erleugnung]의 글/철학적 단상들

인공지능과 자해 문제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1. 4. 20.

청소년들의 자해 충동은 특히 밤과 주말에 심해진다. 밤과 주말은 모든 관계성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친구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고, 의사와 복지사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해 부재하는 시간들. 그래서 주말에는 종종 큰 사고가 터지곤 한다. 아이들 개개인의 자해 문제 뿐 아니라 집단 자체의 소요도 증가한다. 감정 조절이 어려워진 아이들의 갈등이 정점에 이르기 때문이다.

 

회의 시간에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나누던 중 내가 원장님께 말했다. 이건 공상일 수도 있는데, 주말 동안에만 아이들에게 챗봇을 제공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나는 아이들의 관계에 대한 욕구를 우리 치료진들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물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장님은 자기도 챗봇의 다양한 성공사례를 알고 있다면서, 아프간 참전 군인들의 PTSD를 챗봇으로 치료했던 사례를 언급했다. 원장님은 PTSD의 경우 구조화가 쉽기 때문에 용이한 측면이 있었지만 청소년의 자해 문제도 비슷하게 구조화가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하셨다. 나는 가능할 것 같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주말에만 부분적으로 시행한다는 점에서, 챗봇을 (마치 이루다의 사례에서처럼) 동년배의 젊은이로 설정하기보다는 '제한된 용법의 공감적 언급만을 제공하는' 성인 치료자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구조화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자리에 함께 있던 복지사들과 의사들은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원장님은 '아무래도 우리의 기본적인 치료 방향과 잘 맞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차라리 주말 동안에 치료진이 없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자기들만의 milieu를 형성하게끔 구조화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자치적 환경을 만들 수 있게 촉진해주면, 아이들끼리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씀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아쉬운 면도 있었지만.

'[Verleugnung]의 글 > 철학적 단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 투 더 숙명  (0) 2021.04.20
인간의 사물화  (0) 2021.04.20
누가 나 좀 말려줘요  (0) 2021.04.20
기억을 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0) 2021.04.10
회식의 계보학  (0) 2021.04.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