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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당최 공부가 되지 않아 아내와 영화 한편을 보았다. 넷플릭스를 뒤지다 보니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눈에 띄어 나도 모르게 클릭을 해버렸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릴 적부터 바다를 곁에 두고 살았던 한 다큐멘터리 감독. 커리어를 쌓으며 지낸 시간들 속에서 점점 자신을 잃고 있다고 느낌이 들어 바다로 돌아온다. 매일 바다 속을 탐험하기 시작하던 그는 한 암컷 문어를 발견하고 이것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문어도 이 남자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 때부터 두 존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문어는 팔을 뻗어 남자를 만져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먹이를 사냥하는 과정에 남자를 '이용'해먹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이 문어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클라이막스는 감독이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하던 중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그는 문어와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갑자기 북받치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녀(그는 심지어 문어를 계속해서 '그녀'라고 지칭한다)가 그립고, 그 당시 그녀로부터 배웠던 많은 것들에 감사하다면서.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눈물을 흘렸다고들 한다. 심지어 소주엔 산낙지를 외치던 애주가들마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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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순간에는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감동이 따른다." 감독이 한 이 말이 작품의 모든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사실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조우를 다룬 영화는 많다. 죽은 주인을 끝까지 기다렸던 강아지의 이야기(<하치 이야기>)라든지, 늙은 주인과 애틋한 동반 관계를 맺었던 소의 (<워낭소리>) 이야기 같은 것이 그렇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영화들이 주는 감동의 많은 부분은 상당히 인격화된 면이 없지 않다. 가령 우리는 주인만을 바라보는 강아지를 보며 때로는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배우자를 떠올리기도 하고, 혹은 저 멀리 어린 시절의 흔적 속에 있는 엄마의 내적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따뜻함이랄지 애뜻함 혹은 감사함 같은 감정들을 느끼곤 한다.
<나의 문어 선생님>에서 내가 느꼈던 뭉클함도 비슷한 것이었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내가 이 작품을 보면서 앞서 언급된 내적 이미지나 감정들을 떠올리기보다는, 차라리 <에일리언 2>의 비숍이라든지 <터미네이터 2>의 T-800, 혹은 <인터스텔라> 타스 같은 캐릭터들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문어라는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내 머리 속의 범주에 따르면, 문어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에 가까울 망정 개나 소의 그것에 더 가깝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익숙치 않고, 의인화되기 어려운 존재들과의 만남에서 모종의 감동이라는 것이 경험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것만의 어떤 고유한 영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분명 소통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간주되었던 어떤 존재와 연결됨을 느낄 때, 거기에서 어떤 독특한 감정을 느낀다. 거기에는 우리가 의인화라는 필터를 거치기 전에 느낄 수 있는 어떤 감정의 선 같은 것이 있다. 이 경험의 영역은 앞으로도 많은 탐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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