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최면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사람들은 티비에 나와 전생을 탐색한답시고 연예인들에게 최면을 걸기도 했다. 최면에 걸린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는 이상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들은 레몬을 먹으며 달다고 이야기하거나, 바늘에 찔리고도 아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런 면들은 사이비 종교에서 지도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는 신도들의 모습을 닮았다.
흔히들 최면에 잘 걸리는 사람이 있고 안 걸리는 사람이 있다고들 말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최면 감수성에는 여러가지가 영향을 미치지만, 주로 그 사람의 과거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가령 누군가가 아버지에 대해 엄청난 권위의식을 느꼈고 그런 아버지 상에 대해 복종적인 무의식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했을 때, 치료자가 아버지와 같은 느낌을 제공할 경우 최면이 더 잘 걸릴 수 있다. 말하자면 최면에는 어떤 ‘권위’같은 것이 강력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면을 거는 기술은 이런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Spiegel은 최면의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Spiegel 1959). 첫 번째는 아우라(aura)의 단계다. 여기서 최면을 거는 사람은 어떤 아우라를 제공한다. 최면을 거는 사람이 거렁뱅이 같은 옷차림에 말도 더듬고 어딘가 멍청해 보인다면 아우라가 생기지 않고, 그만큼 최면이 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사회적 명성의 징표를 보이고 있고, 멀끔한 옷차림에 뭔가 있어보이는 말투로 말을 건네면 아우라가 작동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들이 종종 스스로에게 전지전능한 인물의 권위를 부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권위가 부여된 사이비 지도자들에게 더 쉽게 빠져든다.
두번째는 정신생리학적 향상(psychophysiological enhancement)이다. 쉽게 말해 자기충족적 예언을 이용하는 것이다. 최면을 거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마치 자신이 미리 점친 것처럼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담배 연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면 머리가 핑 도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최면을 거는 사람이 “당신이 이 담배 연기를 마시고 나면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할 경우, 마치 최면 거는 사람이 그런 현상을 야기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다 보면, 사람들은 교주가 “곧 세상이 멸망한다”고 말해도 믿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셋째는 빠져들기(plunge) 단계다. 이것은 말 그대로 최면 속으로 푹 빠져드는 단계를 말한다. 최면에 완전히 빠져든 사람은 최면술사에 대해 복종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즉 그는 이 관계 속에 “얼어붙는다“. 무의식적인 세계 속에서의 관계, 가령 어릴 적 가졌던 부모와 자신 사이의 관계 속에 고착되어버리는 것이다. 최면술사가 그들을 깨우기 전까지 말이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종속적이고 노예화된 관계 속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에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자발적으로 자기 굴종과 복종의 태도가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 무의식의 흥미로운 면 중 하나다. 다만 슬픈 점은 이런 복종이 마음이 취약해진 사람들에게서 더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시궁창이고 이 세상에 나쁜 사람들 밖에 없다면, 우리의 무의식은 현실을 수용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부인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만약 현실을 수용하면,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절망감만 남게 된다. 그러나 모든 불행이 나의 탓이라고 여기게 되는 경우, 나 자신을 개선하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Fairbairn 1943).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학대하고 복종시키려는 인물에게 더 이끌리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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