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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영화 <존 윅>이 제기하는 문제 – 그 따위 개 한마리가 뭐라고.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0. 11. 28.



<존 윅>을 참 재미있게 봤었더랬다. 이제는 거의 반노장이 되어버린 키아누 리브스가 늙은 몸을 이끌고 헥헥거리면서 총질을 해대는 장면도 물론 재밌었지만, 주제의 측면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충격적이고 신선한 면들을 제공하는 지점이 있다. 

내가 왜 그토록 이 영화에 흥미를 느꼈는지 파고들어가봤을 때, 결국 그 중심에는 이런 질문이 놓여 있었던 것 같다. 이 남자는 왜 이토록 개 한 마리에 열중하는가? 그리고 그가 개 한 마리를 좇아 수십명의 인간을 살해하는 이 어이없는 활극에 왜 나는 그토록 열광하는가? 어째서 이 얼토당토 않은 서사구조에 내가 납득하고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지점을 거쳐갈 수 밖에 없었다. 첫째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기의 문제, 즉 ‘끌개’와 관련된 문제다. 관객이 스토리에 끝까지 몰입할 수 있으려면, 스토리를 끌고 가는 ‘끌개’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대상’의 문제다. ‘끌개’들은 대부분 주인공이 특정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1. 끌개의 문제 -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기가 무엇인가?
모든 영화는 저마다 그것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된 ‘끌개’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끌개는 특히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들에서 더 두드러진다. <올드 보이> 같은 영화에서는 ‘나를 가둔 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악마를 보았다> 같은 경우 ‘왜 나의 아내를 죽였나’라는 질문이 이런 끌개에 해당한다.

끌개가 조금 모호한 경우도 있다. 나에게는 <황해>같은 영화가 그랬다. 이 영화를 끌고가는 주된 끌개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이 모든 일을 이끌어가는 주된 동기가 주인공 구남(하정우)의 ‘의심’인 것처럼 보인다. 구남은 자신이 한국에 밀입국시킨 아내가 외간 남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리며, 한국에 돌아와 아내를 찾아올 일에만 오로지 매달려 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런 동기는 점차 모호해진다. 면정학(김윤석)은 왜 구남을 고용했나? 그는 왜 김승현(곽도원)을 죽이려고 하나? 또 다른 한편에서 김태원(조성하)은 왜 김승현을 죽이려 했는가? 그것도 그렇고 면정학과 김태원은 왜 서로를 적대시하게 됐는가? 영화는 분명 어떤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데 그것을 이끄는 끌개가 뭔지 점점 아리송해질 뿐이다. 심지어 영화는 결말에 관객들이 추정했던 어떤 끌개 (구남의 아내가 치정극의 와중에 살해당했다는 사실) 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공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기교를 부린다.

<황해>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독특함을 주는 영화도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영화가 그렇다. 사실 이 영화에서 끌개를 판별하기는 더 쉽다. 바로 돈가방이다. 영화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추격하는 활극이 벌어지는데, 이 모든 것의 배후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돈가방이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이것이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사물 하나만으로 영화의 모든 동력을 이끌어낸다는 것에 있다.

<황해>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알려준 것은, 극을 이끌어나가는 동기가 꼭 명료하게 드러날 필요도 없고, 그것이 굳이 사람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마치 영화들이 애드거 앨런 포우의 그 유명한 (사실 엄밀히 말하면 라깡이 해석한) <도둑맞은 편지>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편지라는 어떤 비어있는 결여의 장소가 생기고, 이 결여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관계나 사건들이 배열되는 것처럼, ‘치정극’이나 ‘돈가방’이라는 결여의 장소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라깡은 이런 ‘편지’야말로 우리의 무의식 깊숙이 박혀 있는 어떤 욕망의 ‘결여’의 지점을 닮았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시점에 ‘언어’같은 상징적인 공간 속에 스스로를 강제적으로 포섭해야 하는 시기를 거쳐야만 한다. 가령 나는 한국말을 배워야만 타인과 소통할 수 있고, 그런 타인들 속에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강제적인 포섭의 과정에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법이다. 라깡은 우리가 이 ’소중한 어떤 것’을 죽을 때까지 갈망하며 살아갈 운명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 지점을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말하자면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편지’를, ‘아내에 대한 의심’을, ‘돈가방’을 좇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2. <존 윅>의 개

<존 윅>에서의 ‘개’도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개’를 일종의 ‘편지’처럼 볼 경우 ‘존 윅의 개’라는 존재자가 가진 측면 중 너무나도 많은 측면들이 상실되어버린다는 난점이 있다. ‘개’는 존 윅의 욕망의 중심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서만 판단될 뿐, 거기에서는 개 그 자체의 존재도 없고, 개와 존 윅 사이의 정동적 교감이랄지 둘 사이의 관계성, 그 관계성의 역사적 의미 같은 것이 심각하게 손상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손상되고 상실되는 것’이 라깡이 의미했던 바로 그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라깡이라면 우리가 언제나 그 ‘손상된 상태로서의 개’만을 마주할 수 있으며, ‘실재하는 개 그 자체’와의 만남의 영역은 다룰 수도 없고, 다루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지점이 계속해서 걸린다. 우리는 ‘다루면 안 된다’는 명령으로, 실제로는 손실하지 않아도 되는 데이터를 지나치게 손실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존 윅>을 높게 사는 이유는, 그것이 ‘개 그 자체’를 사유해도 괜찮다는 실마리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영화의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존 윅에게 묻는다. “도대체 그 따위 개가 뭐라고 당신의 목숨을 다 바춰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이 ‘도대체 그 개 따위라 뭐라고’라는 말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존 윅과 개 사이의 관계성의 영역은 다른 인물들이 관계성을 맺는 영역과 제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존 윅은 개라는 존재자를 상실한 덕에 자신의 동력을 얻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그 동력의 기원을 납득하지 못한다. 

여기서 ‘존 윅의 개’가 가진 독특성이 드러난다. ‘편지’나 ‘치정극’ 혹은 ‘돈가방’ 같은 경우 어찌되었든 종국적으는 하나의 평면 안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들은 이 요소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체스판 위의 말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왕비나 경관은 서로를 향해 “너도 그 편지를 찾고 있니?”라고 묻고(<도둑맞은 편지>), 구남과 김태원은 “네 애인도 바람을 폈니?”라고 묻는다(<황해>). “너도 돈가방을 찾고 있니?(<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질문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 윅>의 주인공들은, 존 윅이 휘갈기는 총알에 자신의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도대체 주인공 존 윅이 왜 그토록 개의 상실에 그토록 목을 매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 따위 개 한 마리가 뭐라고...”라고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킬러들의 말 속에는, 어떤 수렴 불가능한 지점이, 하나의 평면으로 환원시키기 어려운 공감 불가능성의 영역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은 이론적으로나 임상적으로나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 인간이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했을 때, 그 ‘대상’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가령 누군가 자신의 애완동물을 상실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상실한 그것은 인간들 간의 관계성의 영역 안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개를 상실한 경험은, 가령 어릴 적 엄마로부터의 사랑을 상실했던 경험의 ‘복사본’으로 볼 수 있는가? 인간의 정신은 그런 식으로 ‘반복’을 행하는가?

<존 윅>이 보여주는 ‘반복’은, 이처럼 한 개인이 어릴적 맺었던 인간 간의 대상관계가 인간을 넘어선 대상에게로 반복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오히려 인간들이 맺는 저마다의 관계성이 서로 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 가령 오늘도 우리는 개를, 장난감을, 전셋집을, 고향을 상실한 동료들을 보면서 그들이 맺는 관계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 사태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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