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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섹슈얼리티와 아버지의 부재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20. 12. 17.

 

정신분석학에서는 흔히 Father figure라는 말을 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말한다. 2017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던 <문라이트>에서 후안(마허샬라 알리)은 바로 이런 아버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존재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누군가는 “영화 내내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가 전체 러닝타임의 채 삼분의 일도 등장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영화 속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문라이트>는 자신의 게이 취향을 조금씩 발견해가는 흑인 소년 ‘리틀’의 일생을 그린다. 소년의 엄마는 약물중독에 빠져 그를 돌보지 못한다. 대신 동네의 건달 후안이 그의 정신적 아버지가 되어준다. 리틀은 곧 후안이 사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마약 판매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난다. 리틀의 청년기는, 예상할 수 있듯이 혼란스럽고 고되다. 이후 영화는 전형적인 마쵸 남성이 된 리틀의 성인기를 보여준다. 그는 우연히 과거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친구 케빈을 만나고, 자신 안에 억압돼 있던 섹슈얼리티를 깨닫는다.

 

옛날 분석가들은 게이의 발생 그 자체가 정확히 아버지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보기도 했다. 동일시할 대상이 없다보니 시선이 어머니에게로 향하고, 결국 성적 취향도 어머니를 닮아간다는 식이다.

 

리틀에게서도 아버지의 부재가 중요했던 것일까. 그렇지만 옛날 이론가들도 Father figure가 꼭 생물학적인 아버지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리틀에게는 후안이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리틀의 동성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약상 후안이 지나치게 남성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바람에 리틀이 거기에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후안은 억압의 주체로 기능하는 것 같지 않다. 엄마가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리 만무한 리틀은 어느 날 후안을 찾아가 묻는다. “Faggot이 뭐에요?” 후안은 잠시 당황하더니, 이윽고 그것은 게이들을 낮추어 보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라고 설명해준다. 그는 리틀을 억압하기보다는 차라리 점진적으로 수용할 태세를 보인다.

 

오히려 리틀을 억압하는 것은 사회로 보인다. 성인이 된 리틀의 장신구와 옷차림, 자동차, 말투는 사회가 스테레오타입으로 정해놓은 뒷골목 흑인 남성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른다. 리틀의 진짜 섹슈얼리티가 가면삼아 내세우는 것은 후안의 가면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제시하는 가면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리틀의 섹슈얼리티는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것도, 아버지와의 지나친 동일시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억압은 사회에서 오고, 아버지는 그러한 억압에 저항해 아이의 진짜 섹슈얼리티를 수용하고 붙잡아줄(holding)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다.

 

<문라이트>가 보여주는 결여의 지점은 바로 그곳에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경험하지만, 그것은 억압의 주체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못한채 떠나버려야 했던 그런 아버지다.

 

그 유명한 수영 장면이 관객의 뇌리 속에 공명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후안은 리틀의 성적 취향과 상관 없이 일관적인 아버지의 기능을 담당한다. 온 몸을 잡아삼킬 듯 목까지 차오르는 바닷물 속에서, 후안은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약속해. 내가 잡아줄 게. 절대 안 놓을게”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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