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질소과자 논쟁이 뜨겁다. 질소과자란 과자 봉지를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해 질소를 과다하게 충전하는 행태를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 누리꾼들은 과자봉지를 열었더니 과자는 없고 질소는 없다는 둥, 심지어 "질소를 샀더니 과자가 덤으로 왔다"고 까지 말하고 있는 형국이다.
질소과자, 그 타자 기만의 기술
제조업체의 꼼수를 보고 있자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표적인 예들은 다음과 같다.
(출처 : http://blog.naver.com/kgs012456?Redirect=Log&logNo=40177311181 )
- 업체의 이미지 훼손 방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모자이크 처리를 했으니 양해를 바랍니다 -
'오 시장' 사의 순수 리얼 초콜렛
'유 박사' 사의 유기농 쿠키
'왕관 산도' 사의 클래식 산도
'로테' 사의 고품격 프리미어 비스킷
게다가 질소과자가 어찌나 판을 쳤던지, '소비자문제 연구소 컨슈머 리서치' 에서는 롯데제과, 오리온, 해태제과, 크라운제과 등 4개 업체 과자 20종의 포장 비율을 측정, 과대포장 과자의 순위를 매겨봤단다.
과대포장 과자 순위 (출처 : 소비자문제 연구소 컨슈머 리서치)
과자 한 두개 정도가 뻥튀기 좀 하는 것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다. 혹은 내가 중국에 여행 가서 산 과자 봉지에 공기만 들어있었다든지 중국산 오레오를 사가지고는 뚜껑을 열어봤더니 흰 크림은 없고 거무튀튀한 과자들만 널려있었다 ㅡ 뭐 이정도까지도 넘어가줄 수 있다 이거다. 그런데 이건 뭐 대한민국의 내노라 하는 제과 업체들이 사이좋게 손잡고 애꿎은 과자봉지에 질소나 주입하고 앉아있으니 소비자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꼼수 좀 부리는 차원이 아니다. 이건 소비자를 속이는 것이고, 소비자를 기만하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분노를 느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기만의 자연사
"Size does matter"
영화 고질라의 캐치프레이즈다. 1998년 개봉한 영화 <고질라>는, 개봉 전부터 관객을 불러모으고자 온갖 선전 문구를 떠들어댔었다. 역사상 최고로 거대한 괴수가 등장한다는 둥, 뉴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최강의 괴수라는 둥, 크기가 너무 커서 한 컷에 담기가 힘들었다는 둥... 그래서 그런지 포스터에도 괴수의 몸뚱아리는 없고 발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렇게 생물체의 발만 갖고 포스터를 만든 경우도 전후무후할 터.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아니면 "Size does not matter" 였던 것일까. <고질라>는 그 사이즈만 큼이나 막대한 혹평을 받으며 영화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 자기 모습보다 보여지는 모습을 부풀림으로써 타자를 기만하는 행위는 사실 동물계에서도 굉장히 흔한 일이다. 목도리 도마뱀은 적을 만나면 목 주변을 활짝 펼치고, 복어는 몸을 빵빵하게 만듦으로써 적에게 위협을 가한다. 스컹크의 경우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등 곡예를 펼치면서 까지 자신의 몸을 크게 보이기도 하고, 원숭이의 경우 몸집을 부풀리는 것을 넘어, 소리를 지르고 막대기를 휘두름으로써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1
그런데 사실 이런 습성이 꼭 동물에만 국한돼 있는 건 아니다. 인간사 속에서도 이런 예들은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싸움만 났다 하면 동물 시절 버릇 못고치고 몸부터 크게 만드는 인간들 꼭 있지 않은가? 학교 다닐 때는 키 큰 놈들을 죄다 뒤로 보내서 줄세우더니, 군대 들어가니까 키 큰 놈을 제일 앞에다 세운다. 중고등학교 때 패싸움이 벌어져도 가장 덩치 큰 놈을 앞에다 세우는 이유는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이런식의 타자 기만은 비단 위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 이런 기만의 기술들은 주로 짝찟기에서 활용되는데, 예를 들어 공작새는 그 휘왕찬란한 꼬리를 활짝 펼침으로써, 극락새는 날개를 활짝 폄으로써 암컷에게 어필한다. 심지어 정자새(Bowerbird)는 집을 지어서 암컷을 유혹하기도 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집 있는 놈만 장가갈 수 있다
인간에게서는 이런 타자 기만의 기술이 조금 더 세분화되고 발달한 것 같다. 20대 초반 시절, 필자는 혹독한 외로움에 시달렸었더랬다. 당시 한 여인에게서 매몰차게 버림을 받았는데, 그 여파가 워낙 컸던 지라 몇 년간을 방황하며 지냈었다. 허전한 옆구리를 메꾸고자 암컷, 아니 여성을 꼬드기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나다운 찌질함을 보였던 것이 있었으니... 나는 도서관을 누비고 다니며 '연애의 기술'과 관련된 책을 모조리 빌려다 봤었다. 당시 우리 학교 도서관에 있던 연애 관련 도서는 거의 다 내 손을 거쳐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시 어린 나는 책을 보고 엄청난 감동에 휩싸였었다. 세상에 이런 기발한 방법들이 있다니. 그 책들은 다양한 타자 기만의 방법들을 소개해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여자를 만났을 때, 반드시 차 키를 탁자 위에 올려놓을 것. 그 차가 내 차냐 우리 아부지 차냐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차키는 올려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갑 안에는 현금이 만이 들어있어야 한다. 계산할 때는 절대 쿠폰 따위를 꺼내거나 카드를 꺼내서는 안된다. 무조건 현금으로 계산해야 한다. 심지어 저자 중 한 명은 대놓고 현금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웠는지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했단다. 차의 조수석 앞에 있는 수납함에 막대한 양의 현금을 집어 넣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는 여자를 데려다줄 때,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여자 집이 아무리 가까워도, 무조건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그리고는 톨게이트에서 조수석에 앉은 여자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엇, 주머니에 돈이 없네. 거기 수납함좀 한 번 열어볼래요?..."
이봐 친구, 중요한 건 기술이야. 기술.
허풍쟁이보다 질소과자가 더 괘씸한 이유
이처럼 타자 기만의 기술은 인간 사회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사실 인간이든 사물이든 그것이 '광고'와 관련돼 있다면 무조건 기만의 기술을 내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질소과자든, 소개팅 장소에서의 허풍쟁이든, 일단은 스스로를 광고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그것들은 철저히 타자 기만의 기술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허풍쟁이보다 질소과자에서 더 큰 괘씸함을 느끼곤 한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우리를 기만했다는 측면에서 '옳지 못한 행위'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우리가 '괘씸함'을 느끼는 것과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뭇 다르다. 질소과자가 더 괘씸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만 꼽자면 질소과자의 경우 좀 더 뻔뻔하다는 것을 들 수 가 있겠다.
질소과자의 경우 지나치게 뻔뻔한 감이 없지 않다. 뜯으면 금방 탄로날 게 뻔한대도 뻔뻔하게 배를 부풀리고 있는 꼴이 우리를 열받게 만드는 거다. 허풍쟁이 케이스의 경우 여자가 신내림을 받지 않은 한 그에게서 보이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별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그건 허풍쟁이도 알고, 여자도 안다. 하지만 과자봉지의 경우, 도대체가 시간적 여유라는게 없어서, 봉지를 여는 순간, 모든 진실은 탄로나게 돼 있다. 그걸 제조업체도 알고, 소비자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설마 그런 뻔뻔한 거짓부렁이를 치겠어? 하고 생각하는 데 이게 왠걸. 정말 뻔뻔스럽게도 덩그러니 질소 공기만 담겨 있는 것이다.
뻔뻔함은 조금 더 실제 행위적인 차원에서도 비교될 수 있다. 허풍쟁이의 경우 거짓이 살짝 탄로났을 때, 그것을 감추기 위해 계속해서 이짓 저짓 해가며 노력을 한다. 시계가 짜가라는 게 탄로나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든가, 몰고 온 차가 사실은 자기차가 아니라 아부지 차라는 것을 여자가 눈치챈다면 자기 차는 지금 수리중이라고 둘러대든가 아무튼 이런 숱한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식은땀 뻘뻘 흘려가며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흥, 그래도 나에게 잘 보이고 싶기는 한가보지?'라며 최소한 피식웃음이라도 한번 쯤 날려줄 수 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놈의 질소과자는 너무나도 대담하다. 차라리 과자봉지를 크게 보이기 위해 굉장히 노력한 흔적이라도 보인다면 소비자는 헛웃음 치고 말지도 모른다. 근데 이건 뭐 그냥 질소 공기 빵빵하게 채워놓든가 아니면 떡하니 빈 박스 하나 집어 넣는 것 뿐이다. 나를 속이려거든 속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딴 잡스러운 술수 따위로 나를 속여넘기려 하느냐는 말이다. 이건 진짜 나를 좆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법의 동원, 그리고 질소과자의 퇴장
질소과자의 소비자 기만은 결국 법의 힘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2013년 9월 17일부로, 환경부는 과자류 포장의 빈 공간을 35% 이내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 제품의 포장재질 · 포장방법에 관한 기준 등에 관한 규칙'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포장횟수가 과도하거나 제품 크기에 비해 포장이 지나친 제품을 만든 업체는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이제 예전처럼 대담한 질소과자를 찾아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돈 주고 질소를 마실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그래도 지구 공기층의 78%는 질소니까.
- 참고 : [동물행동학적 관점에서 본 공격성] ; 이무석 ; 서울대 임상연구소 ; 1999년 5월 1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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