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2. 4.

 

사람들은 이 영화가 명백한 영화라 했다. 실제 그렇다. 이 영화에는 군더더기 같은 게 없고 흘러가는 방향이 명확하다. 멕시코인들이 널부러져 있고 그 사이에 돈가방 하나가 있다. 그리고 그 돈가방을 누군가 가로챈다. 원래 돈이라는 게 그렇다. 피터지게 싸우다 둘 다 죽으면 남이 와서 주워먹는 것. 주인공이 돈가방을 가로채면서 부터 영화속에 어떤 흐름이 생긴다. 돈가방이 어딘가로 움직일때마다 극 중 모든 인물들이 움직인다. 수두룩한 멕시코인들이 달겨붙고, 백인 남자들이 달겨붙고, 우리의 안톤 쉬거가 달라붙는다. 그리고, 가장 뒤에서, 우리의 늙은 보안관이 이들의 뒤를 밟는다.

 

쉬거는 누구인가? 아니, 무엇인가?

쉬거는 분명 막강한 악당이다. 영화사에 남을 만한 악당. 그 험악하다는 멕시코 갱들도 이 영화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쉬거를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 쉬거는 다른 인물로 잘 대체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남들에 비해 폭력성이 더 두드러진 악당인걸까? 말하자면, 잔인함에 있어 다른 인물들과 강도적인 차이만이 있을 뿐, 질적인 차이는 없는, 그런 인물인걸까? 하지만 쉬거의 위치에, 또다른 강력한 악당을 위치시켜봐도, 이 영화와 같은 흐름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분명 차이는 질적인 데에 있는 것 같다.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가끔은, 놈이 유령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정말이지 쉬거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쉬거에게서 우리는 그 어떤 인격적인 측면도 발견할 수 없다. 쉬거의 비인간적인 잔인함은 둘 째 손 치더라도, 쉬거에게는 기본적인 인간의 능력 같은 것도 결여돼 있는 것 같다. 쉬거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생각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쉬거가 이성과 판단이라는 인간의 능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는 듯한 분위기는 이곳 저곳에서 풍긴다. 극의 말미에 주인공의 아내를 찾아온 쉬거. 한 손에는 총을 쥐고 있다. 결단을 내리라는 여자의 말에 쉬거는 동전을 꺼낸다.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거지 동전 따위에 맡겨서는 안되는 거라는 여자의 항변 앞에서 쉬거는 주체적인 결정능력의 부재를 보인다. 한 편으로는 단순히 우연의 화신 같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기계같다.

이렇게 '인간적인' 그 무엇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있다 보면 적잖은 혼란이 온다. 그럼 조금 더 다르게 생각해보자. 쉬거는 사람이 아닌 건 아닐까? 말하자면 쉬거는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을 대변하고 있는 요소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돈가방이 자기 스스로를 발견해 가는 노정

쉬거는 돈가방의 또 다른 얼굴로 볼 수 있다. 돈가방을 찾는 자가 없으면, 안톤 쉬거는 그저 의미 없는 이름일 뿐이다. 영화 말미 부러진 팔꿈치 뼈를 너덜너덜 달고 거리로 사라져간 그의 모습처럼.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돈가방이 자기 스스로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에 돈가방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가죽가방일 뿐이다. 하지만 곧 탐욕을 가진 자가 돈가방을 가로채고, 곧이어 그 돈가방의 진짜 얼굴이 안톤 쉬거라는 모양을 띠고 뒤를 쫓는다. 돈가방이 지나가는 모든 곳은 쉬거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버린다. 보안관이 죽고, 멕시코 갱단이 죽어나가고, 르웰린의 아내는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 심지어 크게 연관도 없는 모텔 주인도 살해를 당한다. 안톤 쉬거는 검은 돈을 손에 쥔 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기도 하고, 동시에 돈에 눈 먼 자들이 보이는 광기 그 자체이기도 하다.

쉬거와 돈가방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극 중 쉬거는 언제나 돈가방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추적장치가 돈가방에 가까워질수록 강한 신호를 내뿜는다. 주인공이 돈가방의 위치를 옮기면, 귀신같이 쉬거도 그것을 쫓아온다. 돈가방은 그렇게 결국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돌아온다. 심지어 추적장치를 제거하고, 돈가방을 멕시코 부근 수풀더미에 숨겨버렸는데도, 쉬거는 말하는 것이다. "난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래서 그런 지 몰라도, 쉬거가 가는 곳마다 돈들이 나돈다. 마치 돈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가 빠져나오듯이.

 

쉬거 = 돈가방?

쉬거는 돈을 향한 맹목성을 닮았다. 쉬거는 돈가방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물 불 가리지 않는다. 권총이 없으면 소 도축용 공기총을 이용하면 된다. 걸리적 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이면 된다. 차가 필요하면 훔치면 된다... 게다가 쉬거는 부채 혹은 빚이 가진 '끈질김'과도 닮았다. 우리는 돈을 빌리면서 약속이라는 것을 한다. 어음, 신용카드, 혹은 집문서라는 형식으로. 그것은 부채가 되고, 그 부채는 죽을 때까지 우리를 쫓아다닌다. 아니, 죽고 나서까지도 쫓아온다. 극 중 쉬거는 주인공이 죽고 나서까지 그의 부인을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난 당신 남편과 약속을 했어"

이런 맹목성과 끈질김이 꼭 극영화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밀린 이자를 받아내기 위해 온갖 폭력을 자행하는 사채업자들을 떠올려보라. <똥파리>를 보고 <피에타>를 보라. 그런데 이를 보고 "사람은 역시 무서워"라 한다면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이다. 돈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물론 인간에게 면죄부를 쥐어줘도 된다는 건 아니다. 다만 돈을 둘러싼 잔혹성이라는 건, 인간 자체에 내재한 속성이라기보다는, 돈을 매개로 한 인간에게서 도드라지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을 돈 자체에 근거해 있다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돈의 특성을 쉬거는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쉬거는 돈이 가진 다른 측면도 많이 닮았다. 쉬거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의 본질은 자의성과 우연성이다. 극 중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추적자는 이야기한다. "그놈에게는 원칙이라는 게 있어" 하지만 관객은 그 원칙이라는 게 기껏해야 동전 던지기에 사람 목숨 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 추적자는 스스로 도대체가 그 원칙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왜? 원칙이라는 거 자체가 없으니까. 이동진 평론가의 말 마따나, '우연이 원칙이다? 이건 원칙이 없다는거죠."

쉬거의 자의성과 우연성은 돈의 그것들과 많이 닮았다. 돈의 자의성이란 무엇인가? 돈은 엄청나게 명확한 수학적 원칙을 따르는 듯 하지만, 실제 그 본질을 파헤쳐보면 거기에 근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왜 나는 10시간을 일하고 10만원이 아닌 5만원을 받는가? 1시간 당 5천원이라는 엄격한 수학적 원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1시간에 5천원을 받아야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누가 정했는가? 만약 거기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거라면, '자의적'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그게 동전던지기를 해서 돈을 받는 것과 얼마나 큰 질적 차이를 가지는가?

 


장인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이 남자. 그 역시 돈의 자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돈가방을 둘러싼 비이성,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자

늙은 보안관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본다. 돈가방이 지나가고, 그 돈가방이 지나가는 곳마다 무참한 살육이 벌어진다. 보안관은 도대체가 무엇이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드는지 해석하지 못한다. 도대체 그 돈가방이 무엇이길래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가? 노인은 이를 정합적으로 해석해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저 뒤를 밟을 뿐이다. 그는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자동차 바퀴 자국을 본다. 쉬거가 남긴 탄피와 시체, 그리고 먹다 남긴 우유병을 볼 뿐이다. 쉬거가 앉았던 곳에 똑같이 앉아 똑같은 곳을 쳐다보지만, 도대체가 그 놈 머릿 속을 알 수 가 없다.

쉬거가 돈 자체, 그리고 돈이 불러일으키는 온갖 소용돌이의 대변자라면, 보안관은 돈이라는 것의 실체 자체에 도무지 접근하지를 못한다. 꿈 속에서도 보안관은 아버지가 쥐어준 돈뭉치를 바로 잃어버린다. 보안관은 단지 그것을,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온갖 만행을 관찰할 뿐이다. 우리의 경험 많은 노인은 그것의 잔인성과 맹목성, 끈질김과 자의성 모두를 알고 있다. 보안관은 그것들을 관찰하고 기술하고 분석하지만, 절대 그것 자체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그는 계속해서 쉬거의 실체에 다가가려 하지만, 절대 그 실체에 도달하지 못한다. 종반부 모텔 씬에서 드디어 쉬거를 마주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그. 하지만 실체에 접근하려 하자 그 실체는 환풍구 구멍을 타고 어디론가 도망가버린다. 세상에나, 쉬거가 도망을 가다니.

보안관은 그나마 극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그나마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에게서 무능력을 본다. "이제 이 짓 그만둬야겠어요" 라는 보안관의 탄식에 우리의 허무 짙은 탄식이 겹친다. 우리는 세상을 해석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언제나 그것이 남긴 흔적만을 좇을 뿐이다. 헤겔은 말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그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아니, 노인은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