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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영화] 위커맨 (1973)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1. 7.

[영화] 위커맨 (1973)

 


리즈 시절의 크리스토퍼 리 옹. 목소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위커맨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던 수환 군의 뒤를 좇아, 나도 위커맨으로 2014년의 1월을 맞이해본다. 혹자들은 위커맨을 '컬트 영화의 진수'라고들 한다. 영화의 보편적 법칙을 파괴하고,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며, 기괴함이 흐른다. "야, 이 영화 존나 이상해! 짱이야!" 그렇지만 거기에만 머물면 이 영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기괴하고, 기괴할 뿐이다. 나는 위커맨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봤다. 거기에서 뭔가 다른 호소를 발견했다 이거다. 위커맨의 중심을 관통하는 문제는 섹스와 종교다. 왜 섬 주민들은 괴상망측한 성적 행동양식을 나타내는가? 왜 종교간의 대립이 나타나는가? 이 섬 주민들 사이에 섹스가 난무하고, 온갖 미신적인 것들이 판치고 있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부분을 후벼파보고 싶었다.

영화는 어느 깔끔한 외모의 신사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남자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아 말씀하시길, 이 빵은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를 받아 먹으라..." 남자는 현직 경찰관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정갈하게 빗어넘긴 이대팔 가르마, 그리고 영화 내내 한번도 갈아입지 않는 정돈된 경찰관 제복은 그의 청교도적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킨다. 야무지게 다물어진 입과 절대 웃지 않는 눈매. 그는 분명 절제와 금욕의 미덕이 몸에 밴 진정한 크리스천임에 분명하다.

영국의 한 섬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에는 한 소녀의 사진이 첨부돼 있다. 섬에서 소녀가 실종됐단다. 그의 이대팔 가르마 만큼이나 올곧은 이 경찰관이 소녀를 찾아 섬으로 떠난다. Summerisle (서머아일) 은 어딘가 괴상한 곳이다. 동네 주민들은 뭔가를 숨기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반쯤 미쳐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술집에 모여든 남자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매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질 않나, 여관집 딸은 성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을 것 같은 이 경찰관에게 야릇한 추파를 던진다. 창 밖을 내다 보니 동네의 젊은 남녀가 달빛만 간신히 비치는 잔디밭에서 단체로 섹스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왜 섹스인가? - 섬이라는 고립된 생태계

이 섬은 어떤 영주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영주는 통치자겸 종교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슨 고풍스런 복장을 하고 있는 건 아니고, 걍 마을 이장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이 섬은 오랜 시간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섬 주민은 어딘가 주변에서 보던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 경찰관은 이방인이지만, 동시에 이 섬 주민 또한 경찰관에게 철저한 이방인이다. 사실 이런 모티프는 비교적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편이다. 윤태호 원작의 영화 '이끼'가 그러하고, 나이트 샤말란의 '빌리지'가 그렇다. 닥터 모로의 섬도 그것이 고립된 생태계라는 점에서, 또한 한 명의 지도자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 가만 보면 공통적인 게 있다. 근친교배, 혹은 섹스라고 부르는 것. 그럼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계속해서 섹스를 물고 넘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모든 영화에는 섹스가 있다. 하지만 섹스라는 요소가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과 연계되는 순간, 그것은 우리에게 묘한 불쾌감과 불안감을 안겨주는 것 같다. 왜일까? 감독이 생각하기에 그냥 자극적이니까? 사드의 성 처럼 고립된 곳에 섹스가 난무할 때, 우리 사람들은 묘한 성적 흥분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고 감독은 그러한 우리의 본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제발, 작품이라는 걸 창작자의 의도라는 거랑 연관시켜야만 한다는 구시대적인 발상 좀 버리자. 그런 식으로 나가면 해석이라는 거 진짜 아무 의미도 없다. 감독이 섹스를 도용한 이유같은 걸 여기서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이 고립된 섬에서의 섹스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종의 기원>을 저술했던 다윈은 언제나 '고립된 생태계'에 관심을 가졌다. 비글호를 타고 그가 도달했던 곳은 인간의 손, 아니 더 나아가 내륙의 모든 생명체로부터 고립된 곳, 갈라파고스 군도였다. 그곳에서 핀치새를 비롯한 생물들을 관찰하면서, 다윈은 비로소 진화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태초에 이 섬은 내륙과 연결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우연히, 한 생물종이 이 곳에 도달했을 수 도 있다. 그 이후로 시간이 축적됨에 따라, 이 군도의 생명체들은 생식적으로 격리되기 시작했다. 곧 이 섬의 생물체들은 내륙의 그것들과는 교접할 수 없는 새로운 종을 형성하게 됐다. 종의 정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종이란, '개체 사이에서 교배(交配)가 가능한 한 무리의 생물로서 더욱이 다른 생물군과는 생식적(生殖的)으로 격리된 것' 이다.

따라서 격리된 시스템이 '이질적'이라면. 그것은 분명 격리된 생식의 축적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우리가 밀림 속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생물종, 그런데 어딘가 개구리같이 생긴 생물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자. 이 종은 도대체가 발의 개수도 이상하고, 색깔도 이상하고, 눈 코입이 달린 위치도 이상하다. 게다가 먹이를 먹는 행동도 어딘가가 이상하다. 다른 개구리들 처럼 혀를 낼름 뱉어 먹이를 먹지 않고, 이상한 액체 같은 것을 뿜어 먹이를 먹는다. 이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구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식을 할 것이고, 이들은 모두 그러한 생식의 결과물들이다. 생식적으로 격리된 생물체는 우리에게 경이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그것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경찰관에게 가장 처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닌 섹스에 대한 태도다. 아까 말한 것 처럼, 이 동네 사람들은 어딘가 성적으로 문란(사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문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좀 개방적이라는 느낌?)해 보이기도 하고, 학교의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남근을 상징화한 나무 주위를 돌며 이상한 노래 (수환 군이 중독됐다던 그 노래) 를 부른다. 뭐 주민들이 누구를 강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성에 대한 태도가 좀 개방적인 걸 갖고 뭐 그렇게 문제를 삼느냐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소리 들으면 이 경찰관이 섭섭할 터. 극 설정 상 이 독실한 크리스찬은 숫총각인 걸로 나오기에... (근데 사실 40정도 먹어보이는 이 남자가 그적까지 숫총각이라는 걸 단순히 종교적 신념에 의한거라고 보기도 좀...)

정리하자면, 고립된 생물 군체에서 섹스를 분리시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것들이 자손을 안낳고, 번식을 안한다면야 상관 없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섹스를 배제할 수 는 없는 노릇. '고립된 공간'과 '섹스'라는 두 항목의 관계는 단순히 "엽기적이니까" 혹은 "은밀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니까"라고 단순화 시킬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한편, 우리는 영화를 바라보면서 섹스의 문제가 또다른 것과 연관돼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섬 주민의 미신적 종교가 그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잊혀진 소녀'를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단어의 정의 안에 이미 들어 있지만, 이 소녀 처녀다. 이 소녀는 '5월의 축제'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섬의 종교적 지도자인 영주는 직접적으로 섬 주민들의 성적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여관 집 딸에게 소년을 데려가던 장면을 떠올려보라). 경찰관과 영주 사이에 흐르는 종교적 갈등의 중심을 관통하는 문제 역시 섹스다. 벌거벗은 처녀들이 모닥불 위에서 괴상한 춤사위를 벌이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경찰관과 영주의 종교적 신념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지 않는가?

'섬에서의 고립'이 유발한 '종교적 격리'는 왜 계속해서 섹스의 문제를 대동하게 되는 걸까?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격리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생식적 격리와 문화적 격리 사이의 상관성을 완전히 떼어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두 가지는 공간적 격리에 의해 파생된, 동시에 진행돼 나가는 계열들이다. 게다가 심지어 두 계열은 상호간에도 영향을 미친다. 혹자는 이 섬이 기독교적 생활양식에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저런 타락한 성적 행태가 난무하게 된 것 아니겠느냐 할 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내륙의 도덕 양식, 내륙의 문화를 전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변질'된 것일 수 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섬 주민이 생물학적으로 격리 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맞게 문화 양식이 다르게 자리잡았을 수 도 있다. 인간 종에게 있어 생식의 격리는 단순한 형질 차이 이상의 무언가를 도래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문화, 혹은 신념 체계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도킨스는 밈(Meme)이라고 하여 이러한 문화 자체도 유전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게 정확히 도킨스가 말한 Meme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이토록 오랫동안 고립된 환경에서 생식을 거듭한 군중들 내에는 우리 내륙인들과는 다른 문화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종교 자체가 본질적으로 생식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의 종교생활은 언제나 생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모든 고대 신앙들은 번식과 풍요에의 기원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들은 그 추운 밤 물 한사발 받아놓고 기도했던 것이다. "우리 며느리가 아들 좀 잘 낳게 해주셔요..." 게다가 기독교의 역사는 인간의 성을 억압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왔느냔 말이다. 우리는 극 중 경찰관의 금욕적 태도, 그리고 그에 정확히 대비되는 여관집 딸의 성적 개방성을 잘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라 상태로 요상망측한 춤을 추며 경찰관을 유혹하는 여관집 딸, 그리고 그 옆방에서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찰관. 이 대비는 둘의 종교관이 대립되는 방식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라의 춤사위를 시전하는 처녀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에서도 잘 보이지는 않는다.

 

당신들은 이단이야!

스톤헨지 처럼 보이는 돌기둥들 사이로 벌거벗은 처녀들이 춤을 추고 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한 명씩 모닥불을 뛰어넘는다. 말같은 처녀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저러고 있는 게 이 독실한 경찰관으로서는 당최 납득이 가지 않을 터. 기가 차서 영주에게 이유를 물으니, 저들은 불을 뛰어 넘는 행위를 통해 처녀생식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고, 그 가르침을 통해 신에의 경배를 올리고 있는 거란다. 경찰관이 보기에 이 섬의 젊은이들은 완전히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있다. 오래 전에 이미 파기됐어야 했을 미신적인 것들과, 온갖 비과학적인 내용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경찰관은 영주에게 묻는다.

"처녀 생식이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까? 당신은 지금 저들에게 거짓된 생리학과 거짓된 종교관념을 심어주고 있어요. 저들이 예수의 존재에 대해서 알기는 하는 겁니까?"

"그렇지만 예수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이어 영주는 섬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래 전 섬에 살던 사람들은 지독히도 가난했다. 척박한 섬의 풍토 때문에 그들은 힘든 생활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영주의 증조부가 이 섬을 매입하게 된다. 과학자이자 농학자, 사상가였던 그의 증조부는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으로 무장한 채 이 섬을 완전히 새로 바꾸기 시작한다. 새로운 품종을 들여와 밭을 개간함과 동시에, 섬 주민에게 알맞는 종교관을 정착시킨 것.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교리를 정착시기보다는 잊혀졌던 고대의 신들을 이 섬으로 데려오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이 섬의 그 누구도 예수라든지 기독교의 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이야기를 듣던 경찰관은 참지 못해 외친다.

"당신은 이들을 이교도로 만들고 있군!"

그러자 영주가 미소와 함께 답한다. "이단으로 보일진 몰라도, 미개한 집단은 아니죠"

 

쌍대도식으로서의 종교, 그리고 신념

극 중 경찰관은 영화 내내 동일한 태도를 유지한다. 또한 그는 언제나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영주를 비판한다. 그는 질서의 이름이고, 법의 이름이며, 정통성의 이름이다. (하물며 경찰관이지 않은가?) 그가 섬 주민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이단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정의는 이렇다. '①자기(自己)가 믿는 이외(以外)의 도(). ②전통(傳統)이나 권위(權威)에 반항(反抗)하는 설(). 또는, 이론(理論). 시류(時流)에 어긋나는 사상(思想) 및 학설(學說)'

이단을 정의내리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위에서도 보듯이, '자기' 혹은 '권위' 혹은 '시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주는 경찰관의 비판으로부터 미끄러지기 위해 이것들을 무기로 사용한다. 그는 그의 섬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를 설명하려 하고, 또 그들의 신 관념이 나름의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설파하려 한다. 또한, 처녀 생식이 현대의 생리학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경찰관의 비판에 맞서, 그는 현대의 기독교 또한 처녀 생식의 관념을 버리지 못한 것 아니냐며 응대한다. 경찰관은 법과 정통, 그리고 옳음의 이름으로 영주를 비판하지만, 영주는 너희의 그 옳음도 결국은 우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식으로 비판에 맞선다. 어찌 보면 영주는 경찰관보다 더 열려 있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영주를 완전한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경찰관과 달리, 영주는 경찰관이 자신들을 이단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이런 영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극 초반 영주에게 향해 있던 반감이 어느 새 경찰관에게로 향해 있는 것을 보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대립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다른 전통과 시류 혹은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체계의 본질적인 특징상, 그들은 서로를 배제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군지-페기오 유키오의 쌍대도식 개념을 빌려보고자 한다. 군지 교수는 들뢰즈의 사디즘-마조히즘 분석을 해석하는 데 있어 쌍대도식 개념을 사용했는데, 나는 경찰관이 갖고 있는 진리체계의 구조가 쌍대도식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쌍대도식은 쉽게 말해 '제도적 기술'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 제도적 기술은 '부정'이라는 방식을 그 기본 메커니즘으로 갖고 있다. 세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의미짓기 위해 우리는 '그것 자체를 인정'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따른다.

사디스트는 쌍대도식=제도 자체이며, 제도에 따라 기술하는 자이다. 기술의 본질은 대상화 개체화에 있다. 그것은 대상 외부를 부정하고, 빈틈없이 검게 칠함으로써 전경/배경 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하는 것, 인식하는 것, 덧붙이자면 지각하는 것은 대상화의 완료=부정이라는 의미에서 사디스트의 책무가 된다. 사디스트는 기술을 반복하고, 오로지 국소적으로 부정을 반복하게 된다. 부정의 연쇄에 의해 무한소의 정점을 지향하는 자야말로 사디스트이다. (논문 : 잠재적 다양성과 인과적 쌍대성의 접합 : 뇌 속의 타자 / 군지 페기오 유키오)

쌍대도식, 혹은 배제에 의한 대상화는 언제나 경계짓기를 동반한다. 경계를 짓고 한정을 지음으로써, 그 경계 안의 것들만 똑 떼어내서 대상화시킨다. 쌍대도식의 간단한 예로는 남성과 여성, 혹은 부분과 전체와 같은 이항적 관계들이 있다. 쌍대도식에서의 성이라는 기준에 있어 전경과 배경을 분리시키는 가운데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항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대립항들은 고정이 되어버린다. 쌍대도식의 특징은 '고정'이고, 갖다 붙이는 것이고, 따라서 중간의 애매함을 없애는 것(배경의 분리)이다. 흑과 백 사이에 빨강은 없다. 흑과 백 사이에 회색이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건 이미 흑과 백이라는 대립항을 전제한 상태에서 두 가지의 적당한 조합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에 결국은 쌍대도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때 쌍대도식이 부인되는 경우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라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면? 우리가 설정했던 성이라는 기준, 그 경계선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모순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모순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크레타인의 거짓말 논증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크레타인이 말했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 모순은 정확히 경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크레타인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그의 발화 내용이 참일 테고, 그는 결국 거짓말쟁이일테니, 크레타인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거짓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경계선을 재설정하는 방법이 있다. 더 자세하게 세분하여 구획짓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발화를 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크레타인과 언표된 주체로서의 크레타인, 즉 문장 속에 들어있는 크레타인을 분리시키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장 속의 '모든 크레타인'에서 발화 주체로서의 크레타인을 쏙 빼버릴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모순을 '회피해 나갈'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러셀이 역설을 회피하기 위해 집합의 계급을 나눈 방식과 거의 유사하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회피는 무한한 회귀를 불러일으킬 뿐,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는 못한다. 경계를 계속해서 재설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디스트는 기술을 반복하고, 오로지 국소적으로 부정을 반복하게 된다. 부정의 연쇄에 의해 무한소의 정점을 지향하는 자야말로 사디스트이다. (위와 동일한 논문)

이제 이것을 경찰관의 진리체계 내에서의 경계짓기와 연관시켜 생각해보자. 경찰관의 도식이 모순을 가질 수 있다는, 즉 그것의 경계선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묻는다. 즉 그는 쌍대도식을 부인하기 위해 쌍대도식의 무근거성을 폭로한다. "그래, 너희 말대로 현대 생리학이 처녀 생식을 부정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성모마리아의 처녀 생식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동일한 부정의 방식으로 이 난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경계를 설정하는 수 밖에 없다. "성모마리아는 일반적인 처녀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야해!" 그러나 이것은 곧 "그러면 어떻게 다른건데? 그리고 그 다른 존재의 특징은 뭔데?" 라는 식의 새로운 질문들을 계속해서 양산해내게 된다.

모순을 아예 없애려면 대상화와 경계짓기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 세계 자체가 구성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쌍대도식은 우리가 세계를 구성하도록 하지만, 경계를 짓는 것, 대상화를 하는 것 자체는 분명 그 경계가 허물어질 수 있음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경찰관은 왜 제물이 될 수 밖에 없는가?

영화는 Summerisle 에서의 '5월의 축제'를 향하여 전개되어 간다. 곧 축제가 열릴 예정인데, 영주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이 계속해서 경찰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축제를 보고 가든 안보고가든 그건 당신 마음이지만, 아마 당신이 보면 꽤 불편할거요. 그냥 보지 말고 축제 전날 돌아가시오"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다고, 경찰관은 애초에 볼 마음도 별로 없었는데, 주민들이 계속 보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그것이 뭔지 더더욱 궁금해한다. 5월의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 경찰관은 섬을 벗어나기 위해 타고 온 경비행기에 오르지만, 비행기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비행기가 말을 듣지 않으니 배라도 타고 나가야 할 판이다. 영화는 비행기를 망가지게 한 원인이 섬 주민들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섬 주민들이 고의로 그랬을 수 도 있고, 아니면 실수로 그랬을 수 도 있다. (사실 나는 비행기가 망가지지 않았어야 더 재밌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래야 경찰관이 돌아온 것을 더더욱 자발적인 것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어찌됐든 경찰관은 축제를 마저 보고 돌아가기로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트릭이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경찰관을 제물로 바치기 위한 쇼였던 것. 영주가 필요로 했던 제물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동정일 것, 그리고 법의 이름 아래 있을 것. 따라서 왕좌(명령) 옆에 있는 자일 것. 즉 '순수하게 부정의 도식일 것'. 영주는 아주 알맞은 조건을 가진 이 남자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그가 스스로 이 섬 안으로 발을 들여놓도록 덫을 놈았던 것이다. 물론 영주가 경찰관의 모든 행동을 조정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영화에서도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진짜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경찰관은 자신이 가진 부정의 도식의 외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 도식은 완전한 진리이며, 그것 자체 내에 모순은 없다. 그리고 그가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 만큼 그는 진정 훌륭한 신자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경찰관은 필연적으로 이 섬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명료하고 완전한 도식을 가진 듯한 경찰관은, 스스로가 무모순적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더더욱 큰 모순과 예외를 가정하게 되고, 이 섬의 존재는 그에게 더더욱 명료한 외부로서 부각되게 된다. 순수한 부정의 도식인 그는, 외부를 인정해서는 안되기에, 이 '외부'들로 판치는 이 섬을 가만히 놔둘 수 가 없다. 그는 이 섬을 다시금 법의 이름, 예수의 이름 아래 위치시켜야만 하기에. 더더욱 섬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초반 우리는 경찰관을 보면서, 그의 세계관이 굉장히 견고하고, 안정돼 있다는 느낌을 받게되지만, 극이 진행될 수록 그것이 사실은 굉장히 취약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견고함은 그를 덫에 걸리게 만든다. 극이 말미로 향함에 따라 이 부정의 도식은 계속해서 그것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화장터로 끌려가기 전, 다수의 광인 사이에서 경찰관은 자신이 가진 진리를 설파한다. "당신들인 모두 미쳤어. 난 당신들과 달라. 나는 나의 신과 예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는 곧 경찰관의 이 발언이 단순히 선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개처럼 끌려가는 경찰관은 죽음의 공포에 몸서리치면서 외친다. 거의 울먹이면서, "나는 영생을 믿는다! 나는 부활할 것이다!"

그의 공포가 심해질수록, 그리고 그를 옭죄어오는 불길이 더더욱 거세질수록, 기독교적 영생을 향한 그의 울부짖음은 더더욱 강렬해진다. 그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영생을 울부짖는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화형대 앞, 광인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난 영생을 믿는다!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난 부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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