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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영화 리뷰] 인터스텔라 – 이게 감성적인 영화라고?

by 자급자족 프로닥숀 2014. 11. 12.

[영화 리뷰] 인터스텔라 이게 감성적인 영화라고?

 

 

 

 

1. 들어가면서

 

숱한 기대를 불러 모았던 인터스텔라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로 하여금 영화를 기다리게 만든 질문은 이런 것 이었다 : 크리스토퍼 놀란이 본 우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인터스텔라에 대한 평은 대부분 비슷했다. 놀란의 영화 역사상 가장 감성적인 영화였다는 것. 사람들은 이 영화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의 작품 세계에 드디어 감성이 침투해 들어갔다고, 말하자면 첫 번째 균열이 발생한 것이라며 입을 모았다. 한 기사문을 인용하자면, 인터스텔라는 “크리스토퍼 놀란 필모그래프에서 독특한 영화다. 단적으로 이렇게 감성적인, 누군가에겐 신파라 불리는 뜨거운 감성 펄펄 끓는 놀란의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것을 진정 감성의 ‘침투‘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 즉 놀란이 가진 이성적 세계관의 균열로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남는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이성과 감성을 일종의 대립항으로 간주해버리는 경우, 감성의 침투를 이성의 퇴색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스텔라는 역대로 가장 감성이 짙게 묻어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분명, 감성의 증가가 이성의 퇴색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머피를 향한 쿠퍼의 부성애는 물론 영화 중심을 흐르는 주요한 테마임에 틀림 없지만, 그것이 영화의 중심을 관통하는 테마는 아닌 것 같다. 말하자면, 우리가 포스터에서 보게 되는 문장은 “머피, 기다려. 아빠가 갈게” 라든지, “나는 딸을 찾을 것이다. 무슨 한이 있어도” 가 아니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다. 거칠게 말해서, 인터스텔라의 스토리에는 감성적인 것이 수용되고 있지만 여전히 이성의 힘이 전체 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성의 힘이란 바로 답을 찾아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정신, 바로 그 이성이다. 이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테마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좇아져야 할 어떤 이상향이라든지 목적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 자고로 아빠라면 딸을 저런 식으로 사랑해야 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인터스텔라에서 사랑은 차라리 답을 얻기 위한 노정에서 어떤 실마리를 던져주는 중요한 단초로서의 기능을 떠맡고 있다. 즉,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 사랑이야 말로 뭔가를 가능하게 해주는구나! 사랑의 힘은 대단하구나!” 그렇다면 대체 사랑이 가진 그 힘이라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은 어떤 식으로 답을 찾는 여정에 실마리를 던져준단 말인가?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 속을 흐르고 있는 대립항들과 각 대립항들의 관계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2. 과학이냐 사랑이냐

 

영화 중반부까지만 해도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혹은 ‘비이성(=이성이 아닌 것)적인 것’ 사이에는 묘한 알력관계 같은 것이 흐른다. 우연히 바닥에 떨어져 부서진 착륙선 모형을 보며 머피는 말한다. “아빠 아마도 우리 집에 유령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 냉철한 쿠퍼 박사는 지극히도 과학주의적이고도 합리적인 해소 방안을 내놓는다. “일단 그 물건이 떨어지는 빈도를 시간별로 측정해서 통계를 내봐.” 그리고 이러한 대립 양상은 극의 중반부, 비행사들이 투표를 하는 장면에 이르러 정점에 달한다.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된 상태에서, 쿠퍼와 아멜리아 그리고 로밀리 이 세 명의 비행사는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른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만 박사의 행성, 그리고 에드먼즈 박사의 행성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쿠퍼 박사와 에밀리아 박사가 같은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과학적인 것’에 대해 상이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대립양상으로 나타난다. 쿠퍼나 에밀리아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점은 심각하게도 시간에 쪼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만의 행성과 에드먼즈 행성으로부터 수신된 데이터의 양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쿠퍼와 에밀리아는 완전히 다른 전략을 취하게 된다.

 

아멜리아는, 이미 이전 행성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 본데다가, 소위 과학적 데이터라 하는 것이 턱없이 빈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과학이 아닌 ‘마음의 이끌림’에 따를 것을 호소한다. 반면 쿠퍼의 태도는 이와 대조적이다. 쿠퍼는 설사 전체적인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확률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쪽에 도박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의 가슴 속에도 아멜리아 못지않은 사랑의 뜨거움이라는 것이 있을 터.  그러나 자기도 딸에 대한 감정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걸까,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아멜리아 앞에서 쿠퍼는 지독히도 냉혹하고 엄격한 모습을 보이며 말한다 - 우리 공과 사는 구분합시다. 사적인 정념이 판단을 흐리지 않도록 철저함을 보이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영화 초반부 그가 로봇 타스에게 던지는 질문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말해봐, 아멜리아와 에드먼즈 박사 사이에 뭔가가 있는거지?”

 

정리하자면, 두 명의 과학자에게 있어 ‘과학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일종의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그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아멜리아는 한계 밖의 영역에의 의지를 호소하고, 쿠퍼는 ‘절대 알 수 없는 영역 밖’으로 발을 디디지 말 것을 당부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경계 밖의 영역에 대해, 즉 인식의 한계 밖에 대해 갖는 태도가 역사적으로 ‘물자체’라는 것에 대해 철학자들이 가졌던 태도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멜리아는 말하자면 우리 인식의 한계 영역을 벗어난 규정되지 않은, 무제약적인 것에의, 즉 인간적이지 않은 신적인 것에의 호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신’은 단순히 우리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이 아니라, 칸트의 말에 따르자면 인간이 가지지 못한 지성적 직관을 가진 존재, 즉 인간의 인식 한계를 넘어 사유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것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인간의 한계로는 인식 불가능하지만, 거기에 뭔가 해답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흥미로운 점은, 칸트도 마찬가지로 인간 인식 틀인 시간과 공간 구조를 벗어난 것을 무제약자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반면 쿠퍼의 태도는 물자체에 대해 칸트가 갖는 그것과 닮았다. 쿠퍼는 분명 인간의 인식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넘어서의 것은 다루어서도, 파악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칸트가 물자체를 객관적 실재로 파악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논쟁거리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문제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칸트적 입장을 따르자면, 아멜리아가 ‘사랑’이라고 말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가상, 누메논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이, 그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가상이다. 칸트는 어떤 신적 직관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런 직관이 학문의 영역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태도를 보인 바 있다. 그런 것은 공정성을 지니지 못하고, 작위적인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칸트의 이러한 태도에 우리는 쿠퍼의 그것을 겹쳐볼 수 있다.

 

여기까지 결론을 내려보자면, 우리는 우리 인식 밖의 영역을 인정하되, 그것을 객관적인 무엇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파악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인식의 한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시공간 구조’라는 한계로 나타나고 있다. 쿠퍼와 아멜리아는 모두 ‘현대적 개념의 시공간 구조’라는 한계 속에 있으며 이 한계는 아멜리아의 다음 대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시간의 진행을 더디게 할 수는 있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대립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타결해 나가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쿠퍼와 아멜리아는 모두 한계를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일단 쿠퍼의 방식이 낳은 결과를 추적해보자. 약속의 땅을 찾아 만의 행성으로 떠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최고도의 과학지식과 이성을 갖추었다고 여겨졌던 (“그는 이 분야 최고에요”) 만 박사의 철저한 배신이었다. 그렇다면 아멜리아의 그것은 어땠는가? 극 말미 쿠퍼와 떨어진 에밀리아는 홀로 에드먼즈의 행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의 처참한 시신, 그리고 만의 행성만큼이나 헐벗은 땅이었다. 아멜리아는 끔찍이도 사랑했던 에드먼즈가 보낸 신호와 데이터가 사실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무 짙은 눈물을 흘린다. 물론 에드먼즈 또한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을 터. 하지만 사랑은 그녀를 헐벗은 땅으로 불러오는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만약 여기서 영화가 끝났다면 인터스텔라는 일종의 염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담은 작품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와 다르게, 만약 영화가 쿠퍼와 아멜리아 중 한 사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결국 과학이 승리했다’ 라든지 혹은 ‘결국 사랑이 승리했다’라는 식의 결말을 맺었다면, 마찬가지로 인터스텔라는 그냥 진부한 영화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대의 많은 극영화들은 대부분 이러한 진부함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국면을 향해 달려간다.

 


3. 제 3의 대안

 

쿠퍼와 아멜리아 사이의 대립구조로 다시 돌아와 보도록 하자. 두 대립항을 구분하는 기준은 바로 ‘과학 지식의 한계’ 또는 ‘시공간 개념의 한계’다. 여기서 우리가 두 대립항을 경계 짓는 이 한계점을 뛰어넘어 제 3의 대안을 마련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여기에 대해 쿠퍼는 짧고도 명확하게 답한다. “답은 바로 중력에 있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3의 방법이란 문제가 되는 기준, 즉 ‘시공간 개념의 한계’를 허무는 것, 즉 현대적 시공간 개념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그것을 확장시켜 새로운 인식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쿠퍼는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는 유일한 개념은 중력’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다.

 

이러한 전개 양상은 헤겔이 묘사한 그것과 닮았다. 헤겔 이전의 철학자들은 물자체라는 것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앓았다. 인간의 인식이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한계 너머에 외부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꼴이 되고, 자연히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물자체의 존재를 가정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 있는 물자체에 대해 도대체 우리가 ‘그런 것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한계 내부의 것만을 다룰 수 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 헤겔은 그렇다면 그 경계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전제하고 있던 ‘고정된 경계’라는 것이 도대체 있느냐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 즉 ‘정신의 노정’은 끊임없이 경계가 깨지고 다시 경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들어본 소위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한자경씨의 헤겔 해석을 빌려본다. “너와 나를 이원화하고 분리시키는 그 경계 앞에서 정신은 절망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분리와 차이를 아는 정신은 이미 분리 너머에 있는 정신이며, 좌절을 자각한 정신은 이미 좌절을 초극한 정신이다. 이렇게 해서 한 단계에서 좌절한 정신은 스스로 자신의 좌절을 딛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한자경, 『정신 현상학의 이해』, 6쪽, 2009)

 

다시 영화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이 경계가 깨지는 순간, 그 장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다름 아닌 ‘블랙홀’이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공간은 3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시에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에 구애돼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뉴턴은 그러한 3차원의 공간 내에서 시간에 걸쳐 물체가 운동하는 방식을 기술하였으며 또한 물체들 사이에는 만유인력이라는 것이 작용한다는 것을 밝혔다. 중력이란 만유인력의 일종으로, 지구라는 물체와 인간 또는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을 특별하게 지칭하는 말이다. 뉴턴은 중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까지는 기술할 수 있었지만 어째서 중력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지 그 원인을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참 뒤에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을 내놓게 된다.  그에 따르면 시간 또한 공간과 같은 차원으로서, 우리 공간은 시간을 포함한 4차원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여기서 중력, 나아가 만유인력이 발생하는 이유는 질량을 가진 물체가 유발하는 ‘시공간의 왜곡’ 때문이며 질량이 클수록 왜곡이 심해지고, 이것은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질량을 가진 물체는 시공간을 왜곡하고, 그 왜곡 때문에 물체들 사이에 인력 처럼 보이는것이 생긴다.

 

중력의 극한 형태가 바로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엄청난 중력을 갖고 있어 그 속에서는 시간, 공간, 심지어 빛마저도 완전히 왜곡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이 블랙홀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란 말인가. 블랙홀 안에서 기존의 시공간 개념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직선적 시간 개념이 허물어지고, 따라서 아멜리아와 쿠퍼가 빚는 갈등과 대립양상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곳은 모순이 해결되는 곳, 헤겔이 말한 지양 즉 폐기와 보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블랙홀 속에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물리학을 가장 곤란하게 만들었던 두 개념의 대립이 해소되는 과정을 발견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상대성 이론은 거시세계를 다루는 데 적합하나 미시세계를 다루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반대로 양자역학은 미시세계를 다루는 데 적합하나 거시세계를 다루는 데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 두 이론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통일장 이론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있어 왔다. 최근에는 초끈 이론이 통일장 이론의 후보로서 제시되고 있다)

 

물론 과학적 사실에 입각해서 볼 때, 블랙홀에 들어간다고 해서 실제로 시공간의 한계가 깨지거나 우리가 5차원의 시공간 개념에 들어설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블랙홀이라는 상징물이 이 영화에서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신의 투쟁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어떤 영화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또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블랙홀을 어떤 궁극적 해결의 장소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간주하는 경우 우리는 또다시 주관과 객관의 형식적이고 고정적인 구분에 빠져버리며 이럴 경우 블랙홀을 일종의 객관적 물자체로 인정하는 함정에 빠져버리게 된다. 사실 놀란 감독도 이와 비슷한 관점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쿠퍼 박사가 블랙홀에 들어갔다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블랙홀로의 진입은 다만 정신의 노정 상의 한 단계를 묘사해줄 뿐이다.

 

 

4. 죽음을 감내하기

 

마지막으로 우리는 블랙홀을 대하는 쿠퍼의 태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극 말미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우주선이 짐이 된다는 이유로 자기 스스로 블랙홀 속으로 뛰어든다. 물론 아멜리아가 안전하게 에드먼즈의 행성에 도착하도록 일종의 배려 또는 희생정신을 발휘한 것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태의 일면만 보는 것이다. ‘쿠퍼는 다만 아멜리아를 위해 본인을 희생했을 뿐인 데, 운 좋게도 우연히 블랙홀에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억지는 아닐까?

 

블랙홀로 뛰어드는 그의 태도에는 어떤 능동성 같은 것이 담겨있다. 블랙홀이 어떤 실마리를 주는 해소의 장소가 될지, 혹은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 내어버릴 지옥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쿠퍼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그 안으로 던져 넣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또다시 헤겔의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헤겔은 수영의 비유를 들며 칸트를 비판한다. 물자체를 가정하고 물자체에의 접근을 금지시키는 건, 마치 수영을 배우기 전에는 물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수영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는 일단 물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수영을 하는 나라고 하는 건 물과 떨어져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서설에 적절한 부분이 있어 인용해본다.

 

그러나 죽음을 무서워하고 파괴되는 것을 철저히 막는 생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생이야말로 정신의 새인 것이다. 정신은 오직 절대적으로 찢겨져 있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은,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거나 거짓이다. 이제 이로써 이것에 대해서는 다 마쳤다라고 말하고서 그로부터 다른 어떤 것으로 넘어갈 때처럼,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이런 권능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대면하고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통해서만 이러한 권능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쿠퍼가 보여주는 태도이고, 지젝이 그의 저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태도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한계에 마주친다. 그 한계 앞에서 정신은 좌절한다. 하지만 용기를 가진 정신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경계를 스스로 깨뜨리며, 다시 새로운 경계짓기를 향해 나아간다. 이제 옥수수 농사는 망했다고 한숨 짓는 브랜드 박사 앞에서, 쿠퍼는 그 특유의 자신감에 찬, 남부 사투리 섞인 말투로, 툭 던지듯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겁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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