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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시네도키 뉴욕

by verleugnung 2020. 8. 15.

몇몇 리뷰들에서는 <시네도키 뉴욕>의 상황을 영원회귀에 비유하더라. 영화는 일직선적인 시간 구조를 따르는 대신 지속적으로 도약하는 시간 구조를 다루고 있으며, 언제나 '현재'의 묘사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주인공의 처지가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되풀이해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닮지 않았냐는 것이다.

 

근데 내가 영원회귀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 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그렇게 와닿지는 않는 느낌이 든다. 정말이지 영원회귀 개념만큼 나를 혼돈에 빠뜨리는 개념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말로 그걸 표현할 수는 있고, 어디 가서 끄적거릴 수는 없지, 그게 진짜 무엇인지, 왜 니체가 그런 개념을 창안할 수밖에 없었는지 '몸으로' 느끼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내 지능이 딸리는 걸까?

 

심각한 오독일지 모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회귀'를 차라리 '재귀'로 바꿔서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석사 논문을 쓸 때 <차이와 반복>을 주 텍스트 삼았고, 항상 '반복' 개념과의 연관 하에서만 영원회귀 개념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 

 

반복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나는 어떤 '벡터'가 반복된다고 이해하곤 했다. 수학으로 따지면 특정한 기울기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 기울기만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A가 반복될 때, 결코 동일한 것의, 즉 정해진 기울기나 정해진 함수의 외형이 반복되지 않는다. 어떤 힘 (들뢰즈는 차이를 만드는 힘이라고 보는데) 이 반복되고, 그런 반복의 와중에 계속해서 다른 것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시네도키 뉴욕을 '영원회귀'가 아니라 '반복'에 대한 영화로 바꿔서 봤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이 영화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주인공 코타드 (그의 이름이 Cotard라는 것도 사실 할 이야기가 많다. 코타르(불어 이름이라) 신드롬이라는, 자기 몸이 시체라고 생각하는 망상이 있는데 거기서 따온 이름이기 때문) 는 극작가다. 그는 아내와 불화에 쌓이는데,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말한다. "아니 남의 작품을 연극으로 만들지 말고 당신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게 어때?"

 

그 때부터 코타드는 자기 삶을 연극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커다란 세트장을 빌려서 하나씩 자기의 삶을 작품화하기 시작한다. 근데 웃긴게 이게 계속 연쇄과정을 거쳐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까도까도 계속 나오는 러시아 인형처럼 말이다. 결국 코타드가 만들기 시작한 작품 A 속에는 코타드의 복제품이 발생하게 되고, 그러한 코타드의 복제품은 또다시 작품 B를 만들고, 그 B 안에는 코타드의 복제품의 복제품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코타드 본인은 원본의 자격을 갖고 있다가 이런 반복의 과정 가운데서 결국 원본으로서의 지위를 잃는다. 영화가 진짜 웃긴게, 가령 코타드가 사랑에 빠진 어떤 여성이 코타드의 복사물에서 더 코타드스러움을 느끼면서 그와 사랑에 빠진다든지 하는 식으로 작품 속의 코타드와 실제 코타드 사이에서 온갖 짬뽕스러운 뒤섞임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이게 얼척 없는 웃음을 유발한다.

 

아무튼 다시 반복이라는 주제로 돌아와서, 내가 위에서 '재귀'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는데, 그런 개념에 이끌렸던 이유는 바로 이렇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산출한다. 가령 코타드는 작품을 만든다. 이런 경우 우리는 생산한 자와 생산된 것 차이의 구별을 짓는다. 생산된 것은 항상 생산한 자에게 종속된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영화는 그것이 결국 전복되는 처지를 보여준다.

 

코타드는 자기 자신이 산출한 것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는 혼돈을 겪는다. 사본들은 원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본 그자체들로서 힘을 얻으며, 오히려 힘이 흘러넘치다 못해 원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월권'을 행사한다. 

 

영화는 말하자면 이런 '월권'의 현상을 아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월권을 다른 말로 하면 재귀다. 피드백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산출한 것에 영향을 받아 다시금 산출을 하는 식으로 언제나 나 자신으로 재귀하는 과정에서 지금 현재의 모습과 다른 무엇으로 언제나 변해간다. 거기에는 일직선적인 것은 상정될 수 없다. 니체의 표현을 따르자면, 나는 지금 던지는 이 주사위의 수가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시간이 직선적이지 않은 근본 이유는 시간을 통해 유지되는 일관적 자아가 부서지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계속 변하는 나만이 있다. 여기서 영원히 회귀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재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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