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erleugnung]의 글/별 걸 다 리뷰

킥애스의 감동

by verleugnung 2020. 8. 21.

자녀를 구출하거나, 혹은 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의 모티프에는 어딘가 가슴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데가 있다. 채플린의 작품 중 내가 유일하게 눈물을 흘렸던 작품이 <키드>였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스타워즈>에서 루크가 스승인 오비완의 죽음을 마주하는 장면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이상한 건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테마에서는 그런 깊은 감동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어떤 '이상화되고 열망된'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오는 정취 때문일까? 가령 나는 작품 속의 아들에 동일시하는 과정 중에, 나의 무의식이 갈망하던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면서 감동을 느끼게 된 것일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킥애스>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감동을 느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아들이 아닌 딸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데, 도대체 내가 동일시할 만한 대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난 아이가 없을 뿐더러, 확실히 아버지의 관점에서 감동을 느낀 게 아니었으므로.)

 

어머니-아들 관계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던 내가, 어째서 아버지-딸이라는 요소에는 이토록 공명할 수 있단 말인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의 모습을 띠었지만 그 행동에서는 지극히 남성적인(물론 이건 전통적인 의미의 '남성성'을 의미한다) 캐릭터를 대변하는 힛걸에게서 동일시의 대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까? 에이, 어쩐지 어딘가 구차한 설명인 것 같다. 그보단 힛걸이 그렇게 남성화 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조건들, 어떤 운명같은 것들이 빅대디의 죽음을 더 '비극'으로 만들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끝까지 딸에게 가르침을 전수하는 빅대디의 모습에 루크를 보고 미소지으며 죽음을 맞이하던 오비완의 모습이 겹친다. 어머니가 없는 아이를 혼자 길렀던, 그리고 그런 아이와 '범죄'를 공모했던 <키드> 속의 채플린의 모습도 반복되는 것 같다.

 

다만 <킥애스> 비극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킥애스>에서는 아버지의 유산이 단순한 '범죄'라기보다는 '극악 무도한 폭력'의 형태를 띤다. 게다가 그런 극악 무도한 유산은 아들이 아닌 딸 즉 여성에게 대물림된다.

 

말하자면 <킥애스> 안에서는 가르침을 준 스승을 상실하는 아들의 테마가, 그리고 그러한 아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켜주려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가 '딸'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경유하게 되면서 한층 더 강력해진 비극으로 거듭난다.

거기에서는 딸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딸의 여성성(물론 여기에서도 전통적 의미의 여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힛걸의 남성화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느꼈기에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을 쓴다)을 거세시켜야만 했던 아버지의 운명과 그것을 따라야 했던 딸의 '그렇게 평범하지는 못했던' 운명, 그럼에도 너무나도 훌륭하게 그러한 거세를 완수해 전사로 거듭났던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과 함께 동시에 그런 아버지의 흐뭇한 시선을 바라보는 딸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통해 목격되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교차하면서 특유의 감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Verleugnung]의 글 > 별 걸 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배트맨  (0) 2020.08.23
외계인 해부 장난감  (0) 2020.08.21
시네도키 뉴욕  (0) 2020.08.15
데어 윌 비 블러드  (0) 2020.08.15
[영화 리뷰] 인터스텔라 – 이게 감성적인 영화라고?  (0) 2014.11.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