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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비인간의 의사소통을 다룬 영화들이 꽤 있다. 나는 그것들이 크게 두 범주로 나뉠 수 있다고 본다. 하나가 번역을 매개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전자의 예로 <듄>을, 후자의 예로 <스타워즈> 시리즈를 들고 싶다.
<듄>에서는 다양한 종족들이 서로 소통을 하기 위해 특정한 번역 장치를 사용한다. 이 번역기는 상호전환 기능이 있는데, 외계인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어 인간에게 전달되고, 반대로 인간의 언어는 외계어로 번역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식이다.
번역이 강조되는 관점에서는 언어의 의사소통 기능이 강조되기 마련이다. 의사소통의 효율성이 극대화될수록 언어의 존재 의미도 더 커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보편성이 중시된다. 서로 이질적인 개체들 간에 소통이 가능하려면 일단 어떤 공통된 보편 언어가 있어야 하고, 그들은 이 보편 언어를 함께 사용함으로써만 가장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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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기능도 사뭇 유사한 면들이 있다. <스타워즈>는 이런 보편성을 보증하기 위해 C-3PO라는, 약 6백만개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번역 전문 로봇을 등장시킨다.
그런데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C-3PO의 존재론적인 지위는 단순히 소통을 매개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극 중의 C-3PO를 단순히 '번역기'로 치부하지 않는다.
C-3PO에게 고유한 캐릭터를 구축해 준 조지 루카스의 업적 덕분인 걸까? 우리가 그에게서 하나의 인격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가 단순한 번역기로만 치부되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스타워즈>의 세계관이 그 구조상 본질적으로 그런 해석을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고 본다. 이 세계에서는 '번역기'의 지위가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그 많은 시리즈들 중에서 C-3PO가 자신의 본업인 번역의 업무를 수행하는 장면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
<스타워즈>가 이질적인 개체 사이의 소통을 그리는 방식은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C-3PO로 대변되는, 매개체가 요구되는 소통이다. 두 번째는 (<듄>에서와 달리) R2-D2로 대변되는, 매개체가 요구되지 않는 소통이다. (단순한 삐빅거림을 하나의 언어로 이해하는 극중 인물들을 보다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꼭 R2-D2가 아니어도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예는 수두룩하게 많다. 츄바카가 특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면, 관객 누구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 솔로만큼은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한다. (상당히 정교한 의사소통이 요구되는) 우주선 안에서도, 승무원들은 제각각 자기들의 소리를 내는 가운데 복잡한 의견을 주고 받는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만달로리안> 시리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만달로리안은, 베이비 요다 (정확히는 그로구) 가 단지 옹알거리는 소리를 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 옹알거림은 <가오갤>에서의 "I am Groot"보다도 더 단순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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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체가 불필요한, 아니 매개체가 없다고 봐도 될 이런 종류의 의사소통에게 우리는 어떠한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단지 '예외적인' 소통의 양식인 걸까? 단지 스타워즈 같은 스페이스 판타지물에서나 가능한 공상물인 걸까?
나는 이처럼 보편적 매개체가 불필요한 소통의 양식이야말로 오히려 매개체가 개입되는 소통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보편적 언어가 부재하는 상황이보다, 오히려 보편적인 언어가 존재하는 상황이 더 예외적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인간이 비보편적인 방식으로 소통한는 사례들은 이미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실제로는 도처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큰 분율을 차지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뿐이다.
사람들은 언어를 매개하지 않고도 반려동물과 충분히 명료하게 의사소통을 한다. 요즘 태어난 세대들은 알렉사나 지니 같은 인공지능과도 편안하게 소통을 한다고 들었다. 말을 어떻게 건네야 인공지능이 더 이해를 잘 할지 어렸을 때부터 터득한 덕분이다.
8-90년대 이전에 태어난 세대들이 검색 엔진을 다루는 데 더 곤혹을 겪었다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젊은 세대들은 어떤 키워드를 넣어야 인터넷 페이지와 더 효율적으로 소통할지 몸으로 안다. 반면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소통 방식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약간의 고생스러운 수고를 한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이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도 언어 이외의 소통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가령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와 대화를 나눌 때, 필요한 정보의 50% 이상을 비언어적인 신호들에서 얻는다. (표정, 제스쳐, 말에 담긴 어조와 성량, 옷차림, 눈빛, 어떤 의자를 선택하는지, 진료실에 들어올 때 어떤 방식으로 들어오는지 등등)
상황이 이럴진대 이제는 그만 '의사소통'이라는 주제에서 '언어'를 따로 떼어버려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아직도 필요 이상으로 보편적 언어랄지 번역이랄지 하는 것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라는 것에 골몰하는 바람에 소통이라는 것의 본질을 계속해서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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